-1980년 광주학살, 그리고 ‘살아남은 자의 슬픔’
“어떻게 그 죽음들을 모른 체 할 수 있어?”
휴교령과 KSCF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에 의해 박정희가 죽었다. 대학1학년 때였다. 길고 긴 휴교령이 이어젔고 그 휴교령을 촌놈은 만경강 대부뚝에 소를 묶어 두고 쓰디쓴 아버지 담배를 훔쳐 피워대며 자조하고 있었다.
내 젊은 청춘 이렀게 덧없이 흘러가는건 아닌가? 의미 없이 지나긴 싫었다. 공부도 열심히 하고 써클 활동도 하고 싶었다. 그래서 나름 종교에 관심있어 이른바 KSCF(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라는 조직을 들었다.
여기 들어가니 초등 학교. 고등학교선배도 있고 학습도 하고 이른바 엠티도 가며 한참 어울리다 보니 이상하게 개인이 아닌 사회정의를 위해 눈빛이 반짝이는 열혈 청년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엠티때 촛불 의식을 한다며 사회참여에 대한 결의를 꼭 마지막에 하는데 양푼에다 술따라 돌리며 나도 사회적 정의 실현을 위해 이 한몸 받치것다 맹세 하고 있었다. 알고 보니 이조직이 전북대 꼴통들 조직이었던 것 이다.
긴급조치위반이네 뭐네 하며 남한산성 야그 하면 한도 끝도 없고 .. 하필이면 이 조직에 몸을 담글줄이야. 그때부터 내인생도 역시 관운이 활짝 열렸다.
이어진 2학년 초는 이른바 민주화의 봄 이었다. 당시는 학생 자치기구가 이른바 학도호국단이었고 심종섭 총장은 빨간옷도 빨갱이를 연상시킨다며 못입게 하던 사람이었다. 당연히 학내민주화투쟁은 어용 학도호국단을 폐기하고 총장을 교쳬하는 투쟁이었고 이후는 사회민주화 투쟁으로 발전되어갔다. 이른바 80년 민주화의 봄은 그렇게 모든 젊은이들을 용광로 처럼 달구며 세상을 뒤집을듯이 질주하고 있었다.
저녁이면 유인물을 제작해 새벽에 전주시내에 뿌리고 돌아오면 광철이 형이 애타게 기다리다 반가이 맞이하곤 했다.
계엄령
5월 14일로 기억한다. 전두환 퇴진 구호가 구쳬화 되던 때였다.
전주에 있는 모든 대학 연합으로 도청앞을 점거하고 농성하는데 갑자기 경찰들의 진압작전이 펼쳐졌고 세상에 도망간다는게 도경 상무대 쳬육관으로 들어가 허벌나게 쥐어 터지며 탈출에 성공해 학교로 걸어오는데 참 허탈 했다. 그 많은 인파와 요구에도 끔쩍않는데 어떡해야 되나 고민하며 오는데 전북대정문쯤 왔는데 장갑차가 완전 군장을 하고 시내를 질주하고 있었다. 비는 오는데 계엄령이 확대된거 아닌가 해서 서둘러 당시 이미영 선배랑 등사기를 챙기고 도주했는데 계엄확대는 아니었다. 그때 농성단에서 계엄확대 되면 목숨걸고 사수해야지 도망갔다고 지도부 엄청 조졌다.
그래, 나도 계엄군 오면 맞서겠다고 맹세했다.
5월17일, 당시 토요일이 아닌가 생각된다. 시내 진격 투쟁후 이석영 교수님이 통닭에 켑틴큐를 사가지고 왔다. 당시로는 최고의 안주요 최고의 술이었다 풍물과 더불어 멋드러지게 먹고 학생회관 농성장에서 한숨 자는데 누가 흔들며 깬다. 갑선이 형이다. 밤12시 쯤 됐는데 계엄 확대 됐다고 서울서 연락 왔으니 빨리 도발이 타야 된다고 한다.
형님 사수 하기로 했는데 어떻게 갑니까. 형은 전과자고 난 인자 2학년 밖에 않되니 나는 여그 있을라요. 하고 고집을 부렸다. 갑선이 형은 안타까이 나를 쳐다보며 그렇게 학생회관을 빠져 나갔다.
난 정신 차리고 창밖을 주시했다. 잠시 후 장갑차를 앞세우고 양쪽에 대검으로 완전군장을 한 공수부대원들이 진격하고 있었다. 어 시벌 바리게이트라도 치고 뭐라도 있어야 싸우든 말든 하지 이건 무방비로 아무것도 할수 없었다.
순식간에 2층 농성장까지 진격한 계엄군들은 보이는대로 개머리판으로 찍고 대검으로 배때지를 눌러댔다. 이 시벌 빨갱이 새끼들 땜시 두달 동안 휴가도 없이 꼽 살았다고 거친 욕설을 해대며 육모방망이로 사정없이 후려 쳤다. 비명이 난무하고 진압작전 완료라는 무전 소리를 듣고서야 비명도 멈췄다.
계엄군들은 3인 1조로 굴비 엮듯 엮어 호송차로 싫는데 2층에서 차까지 양쪽으로 도열해 진압봉으로 사정없이 후려 갈겼다. 그렇게 우리는 맞서 싸우기는 커녕 무기력하게 진압당해 굴비새끼 엮이듯이 엮여 전주 경찰서로 끌려갔다.
저녁에 이세종 아는 사람을 찾는다. 아무도 안 나서니 같은 농대생인 병하를 대려간다. 잠시 후 물어보니 진압작전시 세종이가 죽었는데 추락사로 증인 서달라는 투란다. 가슴 시진을 보니 멍자욱이 선명 하단다. 그렇게 같이 유인물 뿌리고 데모하며 민주화의 봄을 뜨겁게 달궜던 세종이는 우리 곁을 떠나 갔다.
담날 저녁 쯤인가 기자들이 왔다. 그러면서 광주는 반란이 났다고. 당신들은 전쟁 포로라고.. 세상에 난 아직 스물도 않됐는데, 하고 잡은것도 많고 연애도 못 해봤는데. 벌써 죽음을 생각 해야 하다니.
난 상황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35사단 헌병대 유치장
보안사 지하실을 거쳐 35사단 헌병대로 이송되는데 여성 동지들이 비명을 지르며 운다. 산속 깊숙이 들어가니 혹여 총살이라도 시킬까봐 지르는 비명이다. 이송 책임자가 안 죽인다고 타일른다.
유치장 안에는 유일하게 선배 중 도피하지 못한 은주 형이 같이 잡혀와 있었다. 은주형은 성모형과 함께 그 전부터 수배중 이었는데 5월18일 새벽 진압시 같이 붙잡혀 바로 보안사 지하실로 끌려갔었다.
어느 날 몇 명씩 유치장 야외 수도에서 목욕을 할 기회가 있었는데 발가벚은 은주형 뒤가 등에서부터 발까지 온통 빨간 피딱지로 뒤덥혀 있었다. 세상에 어찌 사람을 이렇게 모질게 팰수 있나. 저 새끼들은 사람 새끼들도 아니라고 하며 두눈에서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 형…
= 야야 괞찮아 괞찮아. ..
얼마뒤 광주에서 총과 실탄 60발을 차고 순창으로 도주 하던 젊은 청년 둘이 잡혀 왔다. 도망갈거면 다 버리지 어찌 총과 실탄을 들고 잡혔을고.
그들에게 총과 실탄은 삶의 이유가 아니었을까? 아니 전쟁과도 같은 격전을 격은 터이기에 자기 목숨을 보장해줄수 있는 유일한 믿음 일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다.
나는 그렇게 35사단 헌병대 유치장에서 약 한달 보름여를 살다 포고령 위반 훈방으로 나왔다.
나와서 고향땅을 밟는데 벼는 푸릇 푸릇 시퍼렇게 자리잡아 반겨 줬다. 눈물이 한없이 흘러 내리며 더운 초여름의 흙냄새를 들이켰다.
80년 8월
무더운 8월 저녁 내방에서 기타를 치며 김민기의 노래를 읊조리고 있는데 누군가 창문을 두드린다. 수배 중 도발이 타고 있는 갑선이 형이다. 형은 내 초등 동기의 형이고 학교도 초등에서 고등, 대학까지 선배요, 옆 동네 산다. 이 형이 좀 키가 작아 농약을 줄때면 사람은 않보이고 농약대만 왔다 갔다 한다고 놀렸었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5월 17일 당시 나를 두고 자기만 도발이 탓다고 미안해 하며 그게 계속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그러니 위험을 무릅쓰고 내집까지 찾아왔지. 둘이 한적한 야외에 앉아 쓰디쓴 소주를 들이킨다.
– 고생 많았지?
= 아니 형이 더 고생인거 같아.
– 잡히면 편해.
= 나 어떡하지. 내 동기들 전부 신검받고 군대 날짜 잡아 놨어.
– 글면 너도 한탬포 늦춘다 생각하고 군대가.
= 글면 도망치는 거잖아. 어떻게 그 죽음들을 모른체 할수 있어?
난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 이라는 책을 읽고 그렇게 죽음 앞에서도 당당할수 있는 용기에 숙연 했었고 항상 뜻이 올바르다면 굽히지 않는게 사람의 도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난 내가 할수 있는일을 하겠다고. 그게 사람의 도리라고 판단했다
새학기가 시작돼 반가운 얼굴들이 눈에 띤다. 농성장이나 써클 활동 속에서 만난 사람들인데 저멀리서 부터 눈도 마주치지 않으려고 한다. 하기사 어린나이에 그 고통을 겪었으니 트라우마도 클 것이다. 다시 조직을 추스리며 장기전을 위한 준비를 할때다. 그 많던 사람들도 다 가고 정보경찰은 대학에 아예 진주하며 감시 촉을 높인다.
80년 5월, 이 세상을 뜨겁게 달궜던 그 함성들은 왜 총칼 앞에 무기력 했던 거지? 어느 권력이든 순조로운 교쳬는 없었다. 그 성격이 한 계급에서 다른 계급으로 교쳬되는 대 혁명 에서는…. 우린 지금까지 역사상 존재했던 모든 혁명적 승리 사례들을 살펴보고 탐구했다. 마오를 공부하고 맑스와 레닌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이땅의 자생적 사회주의는 전두환의 총칼앞에 무참하게 쓰러져간 광주 영령들을 보며 서서히 싹트기 시작했다.
혜수가 싸이나를 먹고 전북대 주변 자취방에서 죽었다. 사실 동기중 리더 였다. 선배같은 동기가 군 입대를 앞두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것이다. 운동에 투신하고 세종이에 이어 혜수 두명의 친구를 먼저 보냈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동지들을 또 먼저 보내야 하나. 금강물에 혜수를 흘려 보내며 제일 능력 없고 못난 동기지만 도망가지는 않겠다고 맹세했다.
82년 11월 3일
이제 대학 4학년 이고 내가 학생 신분으로 할수 있는 일은 다 했다고 판단했다. 부족한 부분은 후배들의 몫으로 돌리고 이 대학을 떠나기전 한가지 꼭 하고 싶은게 있었다. 살아 남은자의 의무요, 고통을 조금이나마 털어버릴때가 됐다고 판단했다. 바로 광주 학살의 진실과 전두환 에 대한 심판이다. 아니 광주 학살이 일어난지 2년이 지났지만 전북대에서 항의 집회 하나 없다는 게 쪽팔렸다.
여러 사람을 섭외하는데 쉽지 않다. 근데 후배 허정이가 같이 못혀 안달이다. 그렇게 난 정이와 2개월동안 전북대 원광대 전주대등에 유인물을 돌리며 시위를 준비 했고 드디어 11월 3일 정이는 나무위에 올라가고 난 칼을 들고 시위를 시작했다. 덤벼들면 활복 하겠다고 선언하며 집회를 이어갔다. 집회 대오를 보니 다 후배들이고 아는 얼굴들이다. 이 시벌 이거 한방으로 조직 다 털리게 생겼다고 자조 하면서도 마음껏 외쳤다.
전북대 학생의 날 기념시위가 벌어졌는데, 이 날의 시위는 새로운 형태로 전개되었다. 시위 주동자인 전희남(토목 4)이 밑에서 과도를 들고 경찰과 대치하는 사이에 나무에 올라간 허 정(축산 2)이 구호를 외치면서 2시간을 넘게 버텨냈다. 학생들의 주목을 끄는 데에 성공한 것이다. 이후 32명이 스크럼을 짜고 정문 바로 앞까지 진출하였다. 이 날의 시위모델은 다음해 봄 1983년 4월의 시위에서도 재연되었다. – 열린전북 2013년 7월호
전주경찰은 지난 6일 전북대 토목과 4년 전희남군(22)과 축산과 2년 許정군(22)을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혐의로 구속했다. 경찰에 따르면 전군과 허군은 지난 3일 전북대 교내시위를 주동한 협의이다. – 전북일보 1982년 11월 8일 7면
전주교도소
0.75평짜리 독방이다. 옆에는 연섭이 광철이 형이 들어와 있다.
야 희남아, 너 땜시 나 보안대에서 엄청 맞았다.
2개월 동안 유인물 돌린놈들 대라고. 내가 잡히고 드디어 해방이 왔다고 어서 오라고 광철이 형이 반긴다. 하기사 경찰 들이 드디어 배트콩 잡았다고 좋아 했으니 오죽 형을 닥달 혔을까.
아버지가 면회 왔는데 술 냄새가 진동한다. 이틀동안 교도소 주변만 빙빙돌다가1번 타자로 왔단다.
어쩔나고 그렸냐. 바닥에 멍석은 깔아주냐.
아마도 일제시대 만주에서 독립군들 돕다가 주재소에 끌려간 이야기를 어머님에게 들었는데 그때를 연상한것 같다. 부모님 면회도 오지 마라 했다
너무 편했다. 172에 56키로로 삐쩍 말랐는데 65키로까지 찌며 내 인생의 최고 전성기를 난 그 0.75평 짜리 독방에서 보냈다.
도망가지 않았기 때문 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