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방네-밀양송전탑 저지 투쟁 주민

동네방네-밀양송전탑 저지 투쟁 주민

강명숙(고정리 부녀회장, 사진 우) 송명희(밀양 주민, 사진 좌)

 

*7월 19일, 전북평등지부 조합원 동지들과 함께 밀양 송전탑 건설 현장을 방문했습니다. 이번 인터뷰는 밀양 송전탑 건설 저지 투쟁을 하고 있는 밀양 주민과 진행했습니다.

간단히 자기소개 부탁드려요

여 이사 온지는 얼마 안됐어요. 원래는 여에서 태어났는데 고정에 부녀회장을 맡고 있거든요. 이름은 강명숙이예요.

밀양투쟁에 결합하게 된 개인적인 이유나 계기가 있다면요.

개인적인 이유는.. 2008년에 이사왔지. 여기가 친정이니까 여기서 태어났지. 여기서 학교 졸업하고 직장나가면서 시집은 남해로 갔어요. 아저씨가 배를 타는 사람이라.., 배를 타다가 몸이 안 좋으니까. 원래 배를 타는 사람은 물 떨어지면 돈 떨어지자나요. 그러고 저는 이제 부산에서 직장생활을 했는데 그러고 나서 장사를 조끔 했는데 장사가 안 되는거야. 그래 말하자면 빚을 지니까 더 이상 거기 살며는 나중을 생각하니까 내가 그때가 오십대 초반이니까 내가 육십을 생각하니까 부산 사는 거 하고 여기 사는 거하고 시골 가는 거 하고 부산 같은 도시 시내같은 경우에는 나이가 들수록 할게 없자나요. 시골 가며는 땅이라도 있으니까 그러고 시댁이 남해기 때문에 남해 갈까 밀양갈까 고민을 많이했어예. 그래 신랑보고 밀양갈래 하니까 오겠대요. 그래 왔는데 우리 오빠가 돌아가시고 큰 올케가 있었는데 다 돌아가시고 엄마가 그때가 80 90다됐는데 혼자 계시니까 여기 왔어요. 근데 엄마는 처음에 반대를 하더라고 딸이 잘 살아서 들어오는 거 하고 딸이 다 해묵고 돌아오는 거 하고는 친정 부모로는 쫌 그러자나. 오지 말라고 하더라고. 여 와가지고 3년 정도 모시고 돌아가셨거든요. 그래도 언니는 니가 와서 엄마를 그거하다 모시다가 그 했으니까 다행이다 했는데. 내가 여기 와서는 2008년도에 왔어요. 2008년도에 오니까 데모를.. 그 앞에는 그렇게 심하게는 안했어. 내 오기 전에는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는데 내 와서도 집회 몇 번하고 이래했지 투쟁을 이렇게 심하게 안했는데 한번은 그때는 조용조용하게 했어요. 그런데 한 번은 공권력을 투입해가지고 들어온 거예요. 공사강행하러 오니까 그 이치우 어르신 분신을 하셨잖아요. 그거를 보니까 분신을 하게 되신 거예요. 그거를 보고는 전부다 개인적인 그거든 또 마.. 다른 사람들은 재산상에 대출 같은 것도 안되고 하니까.. 재산상 가치도 없어지고 그러니까.. 그때부터는 아.. 이게 아니구나 해서 할머니들도 그때부터 인제 그렇게 시작됐어요. 이게. 나는 우리 엄마 산소가 있거든요. 오늘도 내가 가보니까 철탑 설 자리가 요래 여기라니까 아.. 바로 앞에 눈앞에 바로 서는 거예요. 이거는 아니다 싶어가지고 그래가 함께 나와 되는 거지요.

그간 투쟁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이 있다면 어떤게 있을까요?

우리는 산에 올라가는 것이 힘들었거든예. 이번에 5월 달에 이런 조금 평지 저런 데는 안 해요. 저기는 막기도 좋잖아. 그거는 땅도 샀자나. 그런데 공사를 하며는 우리도 얼마나 좋겠어요. 그런데 저~ 산꼭대기, 할머니들은 한 시간 반씩 걸려요. 내가 올라가는데도 내가 아가씨 때 몸이 많이 아팠기 때문에 막 이래 빨리는 못 걸어. 가는데 한 시간 20분씩 걸려요. 빠른길을 간다고 갔는데도 숨이 막 칼딱칼딱하니.. 한번은 딱 올라가는데 아침에 집에서 그때는 5시 못돼서 출발해요. 저 한전에서 전경들 오기 전에 우리가 가야 된다는 이 생각에 그 전에 길이 막혀 못 올라가는 경우가 있어가지고.. 저 만큼 올라가는데 6시가 못됐어요. 막 올라가는 데 포크레인 소리가 막 나는거야. 위에서 딱 거서 심장이 뛰기 시작하는데 내가 갔을 때 한 동네 한 아지메한테 내가 ‘아지메 나 몬가겠다.’ 저 소리가 나자나 심장이 뛰기 시작하는데 펄떡펄떡 숨을 몬 쉬겠는거야. 그래 올라가가 일하는데 다가가니까 딱 끄더라고 앞 팀이 먼저 올라갔으니까. 그것도 펄떡 올라가서 그 자기 땅이라고 줄 쳐 놓은데 있자나 거기 가서 딱 누웠다니까 바로. 누워갖고 노랗고 식은땀이 흐르는거야. 아침부터 헬기 불러야겠다 웃고 그랬다마는 그래도 그때 완전 너무 힘들었었어요. 가서는 경사가 너무 심해서 부딪치지는 않았어요. 거서 부딪치면은 서로가 많이 다치니까. 그러진 않았는데 올라가가지고. 이거는 힘든 것도 아니지 저쪽에는 80,90넘은 어르신들이 이런 유모차 그거 몰고 다니는 할머니들이 거기 기서가 네발로 올라가는 거 보면은 우리 젊은 사람들이 되다 하며는 이거는 엄살이야. 그러니까 정말… 그래도 전국에서 알아주고 다 이렇게 협조를 해주니까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지금까지 투쟁을 이어오게 된 원동력이 있다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지금까지 진짜 위기가 정말 많았어요. 그때가 글자 한자만 적었으면 합의가 되는 그런 시기까지 간 적이 있었어요. 워째 됐는지… 한전에서 그런데 그때 무슨 이유에서 그 싸인을 못받았는지. 왜 그때 싸인을 못했는지 한전에서 엄청 억울해 하는거야. 딱 그때 그래 할려고 했는데 이치우 어르신이 돌아가셨자나예. 정말 그때가 위기였어예. 그래 또 막 힘든 시기가 있으니까 무슨 계기가 되던지 또 다시 돌아서고 돌아서고 이번에도 그랬자나요. 한전은 저거가 이겼다고 생각했지만 아니거든. 전문가들은 저그 의견은 하나도 없고 한전에서 주는 그거 밖에 없었으니까. 똑같은 보고서… 그거는 아니거든. 우리가 좋은 일을 하니까 자꾸 자꾸 좋아진다고 그래 힘이 자꾸 생기는 거예요. 몇 번 위기가 있었는데 그럴 때 마다 단결이 되더라고. 흐트러지는 게 아니고. 그전에는 솔직히 말해가지고 ‘내 아니래도 니가 막겠지’ 이런 게 있었는데 지금은 전부다 한 마음으로 딱 뭉쳤어요. 어르신들이 더 그러한다니까. 우리가 8년을 했는데 왜 우리가 지금 무너져 이런 마음 이예요. 우리가 죽고 나서도 내 뒤에 내 아이들이라도 와서 막아야지 이런 마음 이예요.

(인터뷰 중간에 대책위 성은희 주민이 들어와 인터뷰 합류)

싸움 하면서 생각만 해도 눈물이 절로 나는 순간이 있다면요?

있지. 우리 그거 막아가려고. 공청회 막을 때.. 문을 안 열어 주는 거예요. 우리가 기자회견 하고 들어갈려고 몇 분 나오고 몇 분은 앉아 계셨거든예. 나 같은 사람은 절대로 안 들어 보내주는 거예요. 문을 잠가놓고. 문을 잠가 놓은 것은 좋지만 용역들이 막 켜켜로 이렇게 딱 스크럼 짜갖고. 한번은 넘어졌어요. 그래가 다른 편에서 구호를 계속 외치고 그렇게 하다가 안 되겠다 포기하고 다 가자고 다 돌아섰는데.. 내가 맨 뒤에 섰었지 문 쪽에서 봤을 때 처음이라…맨 뒤에 따라 나오다가 보니까 문이 삐죽이 열린 거예요. 그래 ‘어! 문 열렸다’ 하는 순간에 일단 저돌적으로 소리만 듣고 몸을 들이밀고… 그래 뒤에서 그 소리를 딱 듣고 확 밀어버렸는데 우리 일행에 밀려서 내가 고기 바닥에 나뒹굴어 자빠졌지요. (그래서 어떻게?) 119에 실려갔죠. 그래 병원에 입원했지.

이후 투쟁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성은희) 진짜 급변하자나요. 사태가 하루하루가 틀려지거든요. 지금 장관이 뭐라하냐면 그때 TV토론도 못하겠다 하다가 지금은 하겠다 하거든요. 또 이제 대책위는 몰입을 해가.. 진짜 우리는 죽기살기로 매달려갖고 해야해요. 지금 전문가 협의체도 우리는 참여는 안했지만 우리 대책위 사무국장님은 내 생활이 없어요. 이 철탑 때문에 그 경과지 주민도 아닌데… 이치우 어르신 돌아가시고 그분이 학교 교직생활을 그만두시고 여기에 활동을 하시는데 또 그런 일을 또 해야 하는거예요. 제일 걱정이 이계삼 선생님이 걱정이예요. 그 분이 또 피를 짜야겠구나 그리고 우리는 그분을 위해 또 뭔가를 해야 하나.. 하루하루 그 상황에 맞춰서 우리가 먼저 이끌고 나간 적은 없어요. 그 쪽에서 액션이 나올 때 우리는 그거를 우리쪽에 유리하게 맞춰서 이렇게..

(강명숙) 그래 어디에 사람을 동원시켜달라고 하면 가주는 거.. 우리 할 일을 대신으로 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일을 대신하고 있으니까 우리는 최대한 힘이 되게끔 뒤에서 보필을 해주는 거지 말을 하자며는 그러니까 우리 어르신들이 더 잘 뭉쳐주시더라고. 그 분들이 진심으로… 뭐 하며는 쫌 이래 하다가 말겠지. 시골 어르신들은 그런 마음이 많거든. 지그들 처음에 와가 이래 하다 쪼금 있으면 빠져나가겠지 처음에는 이런 마음을 가지다가 지금은 그게 아니거든 완전 올인을 해갖고 적극 도와주고 있으니까 아 저 사람이 힘이 되겠구나 이런 마음으로 협조를 많이 해주시더라고..

연대하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요?

연대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힘이 되는 거거든요. 우리일인데 오다가 애들 막 다치고 하는 거보면 우리는 그거는 싫어요. 우리 할 때 보며는 학생들이 많이 와줘 산에 가고 막 이래가. 우리는 다치는 것은 괜찮아. 그런데 애들이 다칠까봐. 괜히 젊은 혈기에 애들이 우 하다가 그 애들이 다칠까봐 그게 걱정돼. 우리는 항상 그래 우리가 앞에 갈 테니까 느그는 뒤에 서라고 그래. 싸움은 우리가 싸울게 그렇게 해요. 뒤로 나가라고 해. 우리는 있어만 줘도 힘이 되니까. 그래도 즈그는 아니라고 한발 나오거든요.

많이 다치셨지요?

많이 다쳤지. 이번에 24명인가 다쳤지. 맨 처음에 이치우 어르신이 많이 다쳤고, 돌아가시고.. 그 다음에 스님이 많이 다치셨고. 그 다음에는 시의원 거도 어깨 골절이 다 끊어져가지고 1월달에.. 이번에 말고 작년 여름에 세분인가 헬기에 실려서 다치셨고.. 이번에 올해 많이 다쳤지.. 그러니까 타박상 인대 늘어나고 그런 거는 다친 축에도 안 들어요. 비탈 진데는 첫 날 어르신들이 올라가니까 전경들이 딱 서가지고 못 들어가게 하는 거예요. 거기서 실랑이를 했나봐.. 뒤에서 한전 직원들이 노란 쪼끼를 입고 쫙 오니까 전경들이 길을 열어 준거예요. 그때 뒤에 있는 할머니들은 못보고.. 못보니까 자기들도 모르게 확 들이대니까 할머니들을 뒤로 밟고 지나간 거예요. 인대가 다 늘어나고…

마지막으로 수많은 구호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구호가 있다면요?

보상필요 없다 송전탑 백지화하라!!! 맨날 외치거든요. 밀양 시내만 나가도 보상 더 받으려고 그러는 거 아닌가. 그런데 이래까지 끌고 나오니까 아 그게 아니구나 하지요.

지금까지 인터뷰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Post Author: 전북노동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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