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형 일자리, 빛깔 좋은 독약에 불과
전라북도, 군산시가 10월 24일, 옛 GM군산공장에서 ‘군산형 일자리’ 협약식을 열었다. 군산형 일자리 협약에는 사측으로 GM군산공장을 인수한 (주)명신 외 에디슨모터스, 대창모터스, MPS코리아, 군산상공회의소가 참여했다. 노동자 측은 민주노총 군산시지부, 한국노총 군산지역지부가 참여했다.
협약의 주요 내용
협약의 주요 내용은 군산/새만금 지역을 전기자동차클러스터로 삼고 협약참여 기업과 노동조합이 적정임금, 적정납품단가, 임금격차 축소를 위한 협력관계를 구축하자는 것이다. 이를 위해 상생협의회 내에 ‘갈등조정 중재 특별위원회’, ‘임금관리위원회’ 등을 설치한다.
군산형일자리 협약에서 적정임금은 ‘각 기업의 고용 규모별 전북지역 제조기업 임금의 평균 수준’으로 정의되었다. 호봉제 대신, 직무, 직능, 성과 중심의 임금체계를 적용한다는 내용도 명시되었다.
임금관리위원회의 역할은 매년 적정 임금구간과 임금상승률을 결정하여 참여기업에 제시하는 것이다. 참여기업은 임금관리위원회에서 제시한 적정 임금구간, 상승률 ‘범위 내’에서 임금수준을 결정’하여야 한다.’ 클러스터 내 협약 참여기업들의 원하청 노사가 집단교섭을 하고 여기에서 임금을 결정한다.
교섭에서 이견이 발생할 경우 협의회 내 갈등조정중재특별위원회에 조정, 중재를 요청하고 생산개시 후 5년 동안은 위원회가 제시한 안을 수용해야 한다.
노동시간 단축을 위해 노력한다고 하였지만 초과노동시간에 대한 수당은 주당 4시간까지만 지급하고 나머지는 근로시간저축계좌에 저축하게 하였다. 물량 감소 등으로 감축근무가 발생할 경우 시간저축계좌에 저축된 시간을 차감한다.
‘유연한 인력운영’ 도모를 위해 클러스트 내 집단적 전환배치 등 노동자는 기업 경쟁력 향상에 적극 협조해야 한다. 노조의 ‘합의’가 필요한 경우는 클러스터 밖으로의 전환배치일 경우만이다.
전라북도는 취득세를 85% 감면하고, 군산시는 재산세를 75% 감면한다.
참여기업에 대한 의무조건은 ‘본사 또는 공장이 군산/새만금 지역에 소재할 수 있도록 이전계획을 수립하고, 이를 이행’하는 것, 노동자들의 경영참가를 위해 노동이사제를 도입하거나 이사회에 참관하게 하는 것 등이다.
협약의 문제점
간추린 협약 내용에서 보듯이 ‘상생협약’의 주된 내용은 노동자의 권리 제한이다.
임금의 경우 상한선을 전북 제조업 평균급여로 정했는데, 100인 이하 사업장의 경우 초과급 등을 제외한 상용정액급여는 전라북도 전산업 평균에 비해서도 낮다. 전국 평균과 비교하면 격차는 훨씬 크다. 2019년 4월 기준, 전라북도 제조업 중소규모 정액급여는 261만 원인데, 전국 제조업 중소규모 정액급여는 285만 원이다. 결국 가뜩 벌어지고 있는 지역간 격차를 그대로 둔 채 전북은 값싼 노동력 공급처로 삼겠다는 뜻에 불과하다.
교섭의 틀을 협의회 내로 제한시키고, 5년 간 중재조정안을 무조건 수용하도록 한 것은 명백한 노동3권 제한이다. 민주노총 금속노조는 산별노조로서, 산별 교섭 제도 확립을 줄기차게 추진하고 있는데 협의회의 교섭방식은 산별교섭과 양립 불가능하다. 애써 긍정적으로 해석해보면 지역을 단위로 한 초기업단위 교섭으로 볼수도 있겠지만, 이 역시 지역협약이 확대 적용되었을 때 미조직 노동자에게 노동조건이 상승해야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교섭의 상한선이 ‘전북 제조업 평균임금’으로 정해져 있는 상황에서는 오히려 노동조건 하향화가 뻔하다. 노동3권 제한은 이 상한선을 넘지 못하게 하겠다는 의지 표명이다.
노동시간저축제는 사업자 입장에서는 보다 ‘유연한’ 근무 형태를 도입할 수 있게 하는데 그 효과는 탄력근로제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통상 물량 감소로 인한 휴업 시에는 평균임금의 70% 이상을 휴업수당으로 지급받는다. 그러나 사측이 시간저축제를 이용하면 물량이 많을 때에는 연장, 야간 근무에 대한 초과 수당을 지급하지 않고, 물량이 없을 때에는 휴업수당을 지급하지 않는다. 임금 총액으로 따지면 분명히 노동자의 손해이고 사측의 이익이다.
자유로운 인력 전환배치는 고용 신축성을 최대한 높인다는 것인데 노동자 입장에서는 고용 불안정화다. 노동력은 자본의 필요에 따라 이리저리 옮길 수 있는 기계, 장비가 아니다. 경제 위기가 장기화되는 국면 속에서 기업 간 노동력 전환은 노동자 입장에서도 받아들일 수 있는 측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군산 협약에서처럼 노동조합의 동의 절차를 거치지 않아도 자유로운 전환을 허용해 놓는 것은, 극단적으로는 클러스터가 일종의 파견업체화 되는 결과로 갈 것이다.
노동권 침해는 대단히 방대하고 구체적인 반면 참여기업에게 부과된 의무는 형식적이고 추상적이다. 공장이 군산/새만금 지역에 있어야 한다는 조건은 있으나 마나한 문구고, 노동자 대표를 이사회에 참관시키기만 하면 회사의 의무는 사실상 끝이다. 그 노동자 대표가 자주적으로 선출된 대표일지, 이사회 참관이 회사 투명경영에 얼마나 실효성 있을지 모두 물음표다.
사업의 주축인 ㈜명신의 사업계획에도 우려가 있다. 생산차종에 상용트럭, 파생차, 버스가 추가되었다. 모두 현대자동차 전주공장의 생산품목이다. 완성차 대기업의 위탁생산공장으로 활용되지 않겠느냐는 의혹이 보다 현실에 가까워진 셈이다. 이를 의식해서 ㈜명신은 “국내 자동차 대기업이 자본을 투자하여 위탁생산 할 경우 임금과 복지 수준을 자본투자 기업 수준으로 한다”는 내용을 담은 별도 협약서를 작성했지만 ‘자본을 투자하여‘ 라는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놓았다. 투자만 하지 않으면 그뿐이다.
신기루 지역형 일자리
지역형 일자리 협약식은 군산 이전에도 이미 광주, 밀양, 대구, 구미, 횡성 등 다섯 곳에서 체결되었다. 그러나 가장 먼저 출발했고 가장 떠들썩했던 광주는 여태까지 신설 법인 출자금 문제조차 정리되지 않은 채라 사업의 시작 여부도 불투명하다. 광주 일자리 협약을 비롯해 나머지 지자체들의 소위 ‘상생협약’도 노동권 양보를 주된 내용으로 한다. 그리고 정부는 협약체결을 ‘대가’로 기업에게 세금 감면 혜택을 준다. 권리를 뺏긴 건 노동자인데 말이다. ‘지역형 일자리’, ‘상생형 일자리’로 포장된 일자리 정책의 실상은 기업 지원 정책에 불과하다.
정부의 일자리 정책 기조가 보조금 투하 식의 기업 지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청와대 고위관계자란 이가 “기존 산업의 개념과 완전히 달라지고 있다. 톨게이트 수납원이 없어지는 직업이라는 것도 눈에 보이지 않나” 라고 말했다는 데서 청와대의 경제관과 노동관을 선명하게 읽을 수 있다. 허울에 불과한 4차 산업혁명을 좇으면서 노동권의 포기가 4차 산업혁명의 전제조건이라는 인식 말이다. 몰 노동적일 뿐 아니라 몰 경제적이다. 건설업으로 경기부양을 모색했던 이명박 정부와도 차별점을 찾을 수 없다.
정부의 일자리 정책은 기업을 양(+)적으로 지원 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각 지역별로 일자리 유치 경쟁이 치열해진 데에서 보듯이 지역형 일자리는 노동권 훼손을 보다 수월하게 만드는 효과를 낳았다. 가뜩이나 전국에서 가장 낮은 수준의 임금 조건인 전라북도는 아예 그 수준을 최고 수준으로 제한하면서 기업을 유치하게 됐다. 전북에서 이렇게 나섰으니, 이후 지역형 일자리에 뛰어드는 지자체에서는 이 보다 더 낮은 수준으로 임금을 제약할 지도 모르겠다. 청와대 · 정부가 나서서 ‘바닥을 향한 경
쟁’을 유도하니 배겨낼 재간이 없다.
그렇다고 새로운 일자리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전세계적으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으로 이미 노동권을 향한 공격은 충분히 이루어졌다. 그런데도 기업의 투자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기업 입장에서 충분한 자본소득이 확보되지 않기 때문이다. 장기저성장 자체가 문제다. 노동권 제약, 보조금 투하는 본질을 외면한 채 단기
지표에만 매달리는 행위이다. 이 정도 조치는 있으나 없으나, 투자할 기업은 투자를 한다. 그것을 청와대 · 정부가 모를 리는 없다. ‘지역형 일자리’는 그 자체로 정치적 목적이 다분한 정책이다.
정부가 지역의 경제상황에 조금이라도 진지한 관심을 갖는다면 중장기적인 산업정책을 내놓는 등 보다 적극적인 개입에 나서야 한다. 지금과 같이 시장에 맡겨놓은 지역 일자리 정책으로는 중복 투자를 피해가기도 어려울 것이다.
문제는 우리에게도
올해 초 청와대가 지역형 일자리 추진을 발표한 이후 지역형 일자리 정책에 대한 문제는 산발적으로 제기되었다. 그러나 하나로 모아지지는 못했다. 민주노총은 금속노조, 현대차지부, 광주본부, 울산본부 등과 ‘광주형 일자리 대응기획회의’를 운영하고 있다.
청와대가 ‘광주형 일자리의 전국화’를 선포하고, 군산형일자리, 구미형 일자리 등이 향간에 오르내리면서 대응기획회의의 범위를 ‘지역형 일자리’로 확대하고 민주노총의 선제적 대응이 필요하다는 공감대는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5월에 개최된 민주노총 8차 중앙집행위원회에서는 ‘지역 상생형 일자리 협약 체결 추진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민주노총의 방침’을 분명히 한다고도 결정했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기획회의’는 그대로 ‘광주형 일자리 대응기획회의’였고, 이미 청와대 · 정부가 적극적으로 ‘광주형 일자리’을 다른 지역으로 확산시키려 힘을 쏟는 시점인 7월에도 민주노총은 ‘광주형 일자리’ 토론회를 개최했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그러는 사이 광주 외에도 네 곳의 지자체에서 지역형 일자리 협약을 체결하면서 선제적 대응은 시기를 놓쳤다.
민주노총 군산시지부가 군산형 일자리 협약에 참여한 것도 큰 문제다. 민주노총 산하조직이 민주노총 · 민주노총전북본부의 방침과 배치되는 의사결정을 한 것이다. 조직 내적으로 충분한 공유와 검토가 이루어지지도 않았다. 경제위기 현실과 담론 앞에 민주노총이 쉽게 흔들리고 넘어갈 수 있다는 우려를 남기기에 충분했다. 군산시지부가 끝이 아니라 신호탄이 될 수도 있다. 민주노총은 이제 지역형 일자리 대응 T/F를 만든다. 지금이라도 그간의 경과를 총 점검하고 대응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
군산형 일자리 협약식에는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해 정의당 심상정 대표까지 참여했다. 심상정 대표는 행사 참여 후 노동권 침해가 우려된다는 글을 SNS에 남겼다. 핵심을 비껴갔다. 지역형 일자리가 경제위기의 대안이 되지 못한다는 점, 오히려 지역 간 격차, 노동자 간 격차를 확대시킬 것이라는 점 등은 고려되지 못한 듯하다. 군산형 일자리 협약식을 참여하는 게 아니라 그에 대한 비판이 필요했다. 정의당은 민주당과의 차별점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진보정당은 특히 경제정책에서 대안이 되어야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정의당의 대안적 경제정책, 산업정책은 보이지 않는다.
지역형 일자리 문제를 다루는 데 여러 곤란이 있다. 노동조건의 상한선을 정해놓는 지역형 일자리는 노동시장 이중구조를 핑계 삼아 중위 계층 이하 노동자를 공격하는 비열한 방법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다른 조건들이 그대로일 때 그 상한선 이상이 가능할 방법이 마땅찮다. 알면서도 입 밖에 꺼내기 어려운, 문제의 핵심이다. 보수언론, 경총 등은 이 지점을 물어뜯는다. 이러다 보니 광주형 일자리 대응에서 민주노총은 귀족노조라는 프레임을 벗어날 수 없었다. 노동자 간 양극화라는 노동시장 이중구조 문제를 민주노총을 비롯한 노동운동 진영도 외면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일자리 문제에 대한 대응은 노동시장 내 격차를 어떻게 축소할 것인지 대안을 마련해 가는 작업과 병행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지역형 일자리 같은 문제들이 닥쳤을 때 수세적인 대응으로만 내몰릴 뿐이다. 이런 준비 없이, 일단 일자리위원회에 참여하고, 일자리 협약에 참여하는 식으로는 결국 조직 노동자와 미조직 노동자 사이의 격차를 더욱 확대시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