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노동자교류 2019년 일본 답사기
총평
올 초, 민주노총 전북본부 본부장과 사무처장의 권유로 지역본부 국제교류위원장직을 수행하고 있다. 방일단 참여에 대해 민주노총전북본부 국제교류위원장으로 방문하는 것이 부담이 되어 계속 고사했었다. 하지만, 일본 동지들을 보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특히, 아베정부의 탄압으로 힘들어하고 있는 동지들을 위로하고 연대하고 싶었다.
2019년 9월 24일부터 30일까지 6박 7일동안 제23기 방일단으로 한일노동자교류에 참여하였다. 2009년, 2017년에 이어 세 번째 방문이었다. 가기 전 걱정이 한 가득이었다. 역대 최고령 방일단이었고, 준비 과정에서 두 명이 이탈하였다. 율동 준비도 부족했고, 방일단이 처음 완결체로 모인 것은 출발하는 당일이었다. 한일관계가 최악이었고, 불매운동 차원으로 ‘일본 안가기 운동’이 제기되었고, 반한감정으로 인해 일본에서 해꼬지를 당할까 봐 걱정하시는 분들도 많았다. 하지만, 이런 시기일수록 한일노동자연대는 더 굳건해야 한다는 신념이 더 강했다. 8월 21일, 국제교류위원회에서 주관하여 한일노동자공동선언도 개최하였고,‘한일경제갈등과 민주노초운동의 대응방향’토론회도 개최하였다. 그리고, 일본의 노동운동 약사와 현황, 최근 간사이레미콘지부 투쟁, 재일조선인역사 관련하여 교육자료를 제작하여 사전 배포하였다. 전반적으로 필자가 판단하기에 참석자들의 호응과 열의는 부족했다.
그렇지만, 준비가 부족했다고 꼭 실패하는 법은 없다. 내가 경험했던 방일단중에서 시간 개념은 제일 철저했고, 한 번의 다툼도 없이 사이좋게 다녀왔다. 밤늦은 시간의 토론회도 열성적으로 참여했다. (한국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다.) 한가지 마음에 걸리는 점은 학동관에 일본동지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도 대다수의 동지들이 그냥 숙소로 가버린 점이다. (숙소인 학동관에서 역까지는 꽤 먼 거리다. 한국동지들에 대한 애정이 없이는 밤늦은 시간에 오기가 쉽지 않다.) 비주류가 많기에 이런 상황을 예견하고, 30분은 자리를 지키기로 약속했지만 갈수록 지켜지지 않았다. 다르게 생각해보면 이러한 자유로운 분위기가 방일단 활동을 보다 철저하게 수행하는 데 도움이 되었는지도… 3주가 지났지만, 다녀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즐겁고 가슴아픈 기억들을 하나씩 하나씩 꺼내어 얘기보따리를 풀고 싶지만, 현안 중심으로 얘기를 전개하고자 한다.
그립고, 소중한 일본 동지들.
내가 읽은 책에서 본 일본인들의 특징은 대동소이했다. 첫 번째, 겉마음과 속마음이 다르다. 두 번째, 계산적이고,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을 구분한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일본 동지들을 만나며,“일본노동자들은 정이 많고, 배려심 강하고, 겸손하고, 작은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다.”는 확신이 점점 강해지고 있다. 나를 다시금 일본을 향하게 한 가장 큰 이유는 정말 고맙고 그리운 일본 동지들을 보고 싶은 마음이다.
일본에 가기 전에 레미콘 탄압으로 구속되어있던 가야하라와 니시야마 동지를 보고 싶었다. 두 분은 간사이레미콘지부 집행위원으로 활동하고 있고, 일본에 보내는 자기소개서를 쓸 때만 하더라도 아직 수감 중이었다. 하지만, 가야하라 동지가 한달 전, 니시야마 동지도 직전에 보석으로 출소했다는 소식을 듣고 가볍고 즐거운 마음으로 출국하였다. 가야하라 동지는 2017년 21기 방일단으로 활동할 때, 학동관에 함께 숙박하며 방일단을 챙겨주었던 고마운 동지였다. 그리고, 니시야마 동지는 2016년 고영홍 선생님의 유언(고향인 제주도와 광주 망월동, 전주에 뼈를 뿌려달라)에 따라 나카무라 선생님과 고영홍 선생님 가족과 함께 방문하였다. 그리고, 그 해부터 8.15 시기때마다 캐러밴을 타고 일본 동지들과 오키나와 활동가들과 함께 와서 전주에서 1박을 하였다. 특히, 오키나와 미군기지 반대투쟁과 재일조선인 문제에 애정을 갖고 연대하던 동지였다.
2009년 처음 일본에 방문했을 때부터 친해졌던 가네나카 동지, 6박 7일동안 교대로 운전대를 잡고 우리의 발이 되어 준 진나이, 투치야, 히노 동지, 항상 우리의 친구이자 형제인 사카구치, 시오자키, 호소카와, 하기와라, 이치하라, 스미다, 그리고, 고쿠보, 고바야시, 다무라, 사가타, 와다, 가토 선생님, 스트로우베리 자매님들도 다시 만나서 너무 좋았다. 나카무라 선생님은 여전히 건강하셔서 다행이다고 생각하고, 오민숙 누님은 2017년에는 하루 빼고 계속 함께 있었는데. 이번에는 많이 함께 하지 못해 아쉬웠다. 동지들과 함께 지낸 시간이 너무 즐거웠기에 일정이 끝났다는 안도감보다 헤어진다는 아쉬움이 더 컸다.
간사이레미콘지부 탄압과 그에 맞선 연대와 대응
1) 간사이레미콘지부의 탄압의 배경: “노조를 와해시켜라“
전일본건설운수연대노조(약칭,‘전일건’)는 1989년 총평 와해 이후 독립노조형태를 유지한 채 산별노조를 지향하고 있다. 일본정부와 자본은 산별노조에 대한 공포와 혐오가 크다. 더군다나 전북지역과 연계하고 있는 전일건과 전항만노조는 조합원들을 대변하는 활동 이외에도 오키나와 미군기지 반대, 반정부 활동에 가장 선도적으로 투쟁하는 조직이다. 이런 복합적인 문제가 근래에 유례가 없는 간사이레미콘지부의 탄압을 불러왔다. 필자는‘협동조합’에 집중하여 간사이레미콘지부 탄압을 살펴보고자 한다.
간사이레미콘지부는 사업주를 추동하여 공장을 가입범위로 하는 지역협동조합을 추진하여 대기업인 시멘트회사와 종합건설회사를 상대해왔다. 시멘트회사와 종합건설회사는 공장을 경쟁시켜 단가를 낮추는 등 일방적인 행태를 벌여왔고, 이에 맞서 레미콘회사는 지역협동조합을 통해 공동수주, 공동판매, 가격인하에 대한 공동대처 등 교섭력을 확보해왔다.
일본경영계(일경련)는 1982년부터 간사이레미콘지부의 활동방식이 업체를 흔들 수 있다고 지적하였으며, 수차례 협동조합을 와해시키려 시도했고 성공했다. 하지만, 그 때마다 노조가 중심이 되어 협동조합은 다시 복구되었다. 그러자, 이제 거꾸로 노동조합을 먼저 공격한 것이다. 이전과 또 다른 점은 정권과 자본의 탄압에 사업주들이 함께 나선 것이다. 이는 협동조합을 통해 벌어들인 이윤을 독식하고자 하는 욕심 때문이었다. 이미, 이전부터 사업주들은 협동조합의 운영을 독점하려고 획책했다. 이에 간사이 레미콘지부는 시멘트 가격인하와 협동조합의 민주적 운영을 위해 2017년 긴끼(=간사이)지역 총파업을 전개했다. 오사카를 제외한 전 지역은 노조의 요구를 받아들였지만, 오사카지역은 극우단체와 연대하여 노조를 함께 공격하였다. 노조와 우호관계를 유지하려는 사업주에게는 불이익조치(물량배당 제외)를 통해 노조와의 관계 단절을 강요하고, 조합원들을 해고하고 노조탈퇴를 종용하였다. 이번에 사카다 부위원장과 동행하여 필자가 김환수 분회장과 함께 방문한 신요도 레미콘의 경우에는 협동조합의 불이익조치로 인해 시멘트 공급이 끊기고, 물량배당에서 제외되어 두달동안 휴업중이었다. 레미콘 동지들은 말한다.‘노조 다음 타킷은 협동조합이 될 것이 자명한데도 한 치 앞을 보지 못한다.’고.
2) 간사이레미콘지부 탄압에 맞선 연대와 대응 현황
2019년 상반기 방한단 토론때만 하더라도 레미콘노조 탄압에 대응하는 지역연대는 적극적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상반기 방한단 보고서에서‘지원단체는 오사카, 나고야, 도쿄에 만들어졌고, 효고현은 준비중이다. 일단, 조합원 대상으로 선전과 조직사업이 급하다. 3월에 500명이 모여 집회를 진행하는 등 조금씩 분위기 올라오고 있다. 하지만, 일본 전체가 노동운동에 대한 인식이 저하되어있다. 집회 평균연령 65세, 어렵다’로 발언하고 있다.
하지만, 이번에 방문해서 분위기가 많이 반전되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법원 앞에서 개최된 레미콘연대집회 및 학동관과 전항만노조 간사이지방본부에서 개최된 간담회의 발언 내용을 요약해보면, 지역연대 및 전국적 연대가 강화되고 있음을 알고 있으며, 특히 최근에 보석으로 출소한 니시야마동지는 “간사이레미콘지부 투쟁은 승리하고 있다.”고 단언하고 있다.
대책위 결성현황을 보면 1년 전에 탄압반대 실행위원회가 결성되어있고, 16개노조 2개 단체가 참여하고 있다. 지역별로는 도쿄, 교토시가현, 효고현에 모임이 구성되었고, 지역 곳곳에서 준비중이다. 11월 16일에는 레미콘 탄압, 오키나와 미군기지 반대, 민주주의 탄압에 반대하는 전국적인 집회를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방일단 활동 둘째날에도 재판에 맞춰 오사카지방법원 앞에서 집회가 진행중이었다. 다양한 노조, 정당, 시민단체가 함께 참여하고 있었으며, 재판이 열리는 날마다 집회를 개최한다고 했다.
니시야마 동지는 간담회에서“우리를 탄압하는 이유는 레미콘회사의 이윤창출을 정면으로 방해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회사의 ‘불법폐기’등 볼법에 대한 반대도 포함된다. 재판이 진행될 수 있도록 회사의 논리는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고, 이러한 정황은 확실히 드러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정권과 자본에 통제되지 않는 산별노조와 연대를 두려워한다.‘고 발언하였다.
레미콘지부의 상황은 어렵다. 사카다 부위원장의 말로는 조합원이 250여명까지 감소했다고 한다. 사측의 협박과 탄압으로 인해 조합원이 많이 탈퇴했다고 한다. 연대가 요구된다.
조선학교 고교무상화 제외에 이어 조선유치원 무상화 제외
1) 조선고등학교 무상화 제외
일본은 2010년 4월부터 고교무상화가 실시하였고, 2010년 당시 연평도 포격사건이 터져 당시 (입헌민주당) 간 나오토 일본총리가 조선학교의 무상화 대상 심사 자체를 동결한 바 있다. 이후, 2012년 12월 정권 교체 후 2013년 2월 제2차 아베신조정권이 지원대상에서 조선학교를 제외하는 법령을 제정했다. 조선학교가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와 밀접한 관계인 점을 들어 ‘지원금이 수업료로 쓰이지 않을 우려가 있다.’며 지급대상요건을 충족하지 않는다는 사유였다. 조선학교 학생들은 도쿄, 나고야, 히로시마, 오사카, 후쿠오카등 일본 전역 5곳에서 소송을 제기했다. 하지만, 오사카만 2017년 1심에서 승리하였고, 네 곳은 패소하였다. 오사카 역시 2018년 2심에서 패소하였다. 현재, 나고야, 히로시마, 후쿠오카는 2심이 진행중이며, 도쿄는 8월 29일 일본 최고법원에서 패소하였다.
2) 조선유치원 무상화 제외
아베정권은 유치원 무상교육 재원마련을 이유로 소비세를 8%에서 10%로 인상했다. 그리고, 외국인 대상 유치원은 제외시켰다. 전체 대상 60여 곳 중 재일조선인 유지원이 48곳(약 80%)을 차지하고 있다. 재일동포와 차별을 반대하는 일본인들이 반대 집회를 매주 오사카부청 앞 공원에서 매주 개최하고 있으며, 9월 26일 개최된 집회에서는 간사이 지역 재일동포와 이를 지지하는 일본인 약 800여명정도가 참여하였다. 특히, 우리와 함께 연대해온 일본동지들이 열성적으로 참여하는 모습은 뿌듯했다.
내 가슴을 우리는 말 “우리의 존재를 알려달라.”
우리가 방문했던 나카오사카 초급학교 교장선생님이 우리에게 당부한 말씀이었다. 일제식민지, 해방, 분단, 남북전쟁, 휴전, 한일수교와 기민정책, 이념갈등 (조총련과 재일거류민단), 북일갈등과 한일갈등까지 재일동포들은 현대사의 고난을 어떤 보호 없이 오롯이 감당하고 있다. 특히, 재일동포들은 한일 수교 후 기민정책에 의해 조국에 버려졌다. 기민정책은 1965년, 한일 수교 이후 당시 이동원 외무부장관에 의해 발표되었다.“재일 한국인은 일본인으로 동화될 운명에 있고, 재일 한국인에 대해 그런 방향에서 일본국민이 배려해주기를 기대한다.”는 내용이었다. 한국의 기민정책(자기 국민을 버리다)은 일본의 동화정책과 쌍생적 관계를 이룬다. 그 속에서 많은 동포들이 국적을 일본으로 전환하였다. 국적을 바꾸지 않은 재일동포는 전체 10%에 불과하다. 국적과 이름을 유지하는 것조차도 너무도 힘든 일이었지만, 온갖 차별 속에서도 신변의 위협까지 감수하며 일본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다. 조선학교 재학생과 일본학교 특별반 수업을 통해 한글과 역사를 접하는 학생도 전체 대상의 10%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 고통은 크다. 학교운영비는 약간의 지방자치단체(그것도 일부) 지원금을 제외하면, 모두 학생과 학부모가 감당해야 한다. 우리가 방문한 나카오사카 초급학교도 극우단체들이 던진 돌맹이에 유리창이 파손되어있었고, 창문에는 안전을 위해 테이프가 붙어있었다. 이러한 재일동포들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함께 이해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