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가 알아야 할 세계노동절 역사
“하루 8시간 휴식, 8시간 수면을 보장하라”
1800년 대 자본주의의 급속한 성장은 노동자들의 희생을 필요로 했다. 당시 노동자들은 하루 12-16시간씩 일했고, 10살도 되지 않은 어린아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에 국제적 노동조직 「인터네셔널」은 일찌감치 1일 8시간 노동제를 노동자계급의 과제로 제시했다.
미국에서도 8시간 노동제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된다. 1885년에는 노동조합연맹(미국노동연맹의 전신)이 1886년 5월 1일에 총파업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노동조합연맹은 8시간 노동일 운동을 제안만 했을 뿐 5월 1일이 가까워졌을 때까지도 전국적 파업을 단행할 힘을 갖지 못했다.
5월 1일의 대규모 시위를 주도한 것은 국제노동자협회와 노동조합연합이었다. 백인, 남성, 숙련노동자 중심의 노동조합연맹과 달리 국제노동자협회와 노동조합연합은 이주, 비숙련, 흑인, 여성노동자가 주축이었다. 8시간 노동일은 낮은 임금에 오랜 시간 일하고 있던 국제노동자협회 소속 노동자들에게 더 절박한 과제였다. 두 단체의 차이는 1886년 5월 1일을 한 주 앞둔 부활절 행사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노동조합연합은 시카고 병기고에서 실내 연설회를 열었다. 참가자들은 성조기를 들고 미국 국가를 불렀다. 국제노동자협회는 시카고 호숫가에 1만 5천명이 모인 집회를 열었다. 집회의 연설은 영어 뿐만 아니라, 독일어, 체코어로도 진행됐다. 참가자들은 적기(赤旗)를 들고 프랑스 혁명가 라 마르세예즈를 불렀다.
그러나 1886년 5월 1일에 국제노동자협회의 주도로 미국 전역에서 30만 명이 참여한 총파업이 단행되었다. 참극은 시카고에서 발생했다. 시카고는 국제노동자협회의 세력이 강한 지역이었다. 국제노동자협회가 주최한 집회 중에 경찰이 노동자들에게 총을 쏴 6명이 목숨을 잃었고, 다음 날 이에 항의하는 집회가 헤이마켓 광장에서 열렸다. 밤 10시가 넘어 사람들이 하나 둘 흩어지고 집회가 마무리될 무렵 누군가에 의해 폭탄이 터졌고 경찰들은 시위대에 총격을 가했다.
미 전역에 노동탄압 광풍이 몰아닥쳤다. 사건 이후 집회를 주도했다는 혐의로 8명의 노동자가 체포되었다. 체포된 8명 중 6명은 당일 집회에 참석하지조차 않았지만 당국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들을 폭동교사 및 살인죄로 기소했다. 법원은 7명에게 사형을 선고했고 이 중 4명이 1887년에 처형당했다. 모두 국제노동자협회 소속이었다. 노동단체들은 반국가세력으로 낙인 찍혀 해산당하거나 공개적 활동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세계노동절의 기원은 사회주의 운동
우리가 기념하는 세계노동절의 직접적인 기원은 1890년 5월 1일이다. 프랑스 바스티유 함락 100주년을 맞아 1889년 7월에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 (사회주의)인터내셔널 창립대회에는 20개국의 대표자 391명이 모여 “(1890년 5월 1일에) 모든 국가와 모든 도시에서 8시간 노동일 시행을 요구하는 대규모 국제 시위를 조직”한다고 결의했다.
1890년 5월 1일이 되어 세계 각국의 주요 도시에서 8시간 노동일을 요구하는 집회가 개최되었고 특히 유럽에서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제2인터내셔널 창립대회의 결의는 1886년의 미국 노동운동을 기리는 국제기념일을 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1890년 5월 1일은 목요일로 휴일이 아니었으므로, 대회가 성사되려면 사실상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고 거리로 나와야했다. 「반사회주의법」이 존재하던 독일처럼 노동자의 정치적 행동이 엄격히 제한된 나라도 있었다. 4년 전 미국에서와 같이 누군가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각국의 노동자들이 한날한시에 단결된 행동에 나선다는 경험도, 보장도 없었다. 회의 참석자들에게 매년 반복할 국제기념일의 제정은 상상하기도 어려웠을 여건이다. 그래서 여러 나라 대표들은 5월 1일 투쟁을 기권하거나 수정안을 제출하기도 했다.
이런 악조건을 넘어 전세계에서 동시다발로 1890년 5월 1일의 대회가 성사되었을 때 당시의 노동운동가들이 얼마나 가슴 벅찼을지를 떠올려보라! 자신감을 얻은 각국 노동운동 대표자들은 1891년 브뤼셀에서 개최된 제2인터내셔널 두번째 총회에서 1890년의 국제 시위를 기념하는 세계노동절 대회를 매년 5월 1일에 개최하기로 정했다.
한국에서의 세계노동절
일제강점기 조선에서도 세계노동절 대회가 개최되었다. 조선 최초의 세계노동절 행사는 1923년 5월 1일 장충단에서 열렸다. 노동자들은 노동시간 단축, 임금인상, 실업방지를 요구하며 파업했다. 1946년 5월 1일에는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주도로 해방 후 첫 세계노동절대회가 개최되었다. 이 대회에는 20만 명의 노동자가 운집했다.
이승만, 박정희 독재정권을 거치며 세계노동절은 날짜도, 이름도 빼앗겨 버렸지만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날짜를 되찾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이름을 되찾지 못해 관공서는 세계노동절을 ‘근로자의 날’로 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