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노동자들의 투쟁이었던 메이데이
이주노동자ㆍ이민자들과 연대하는 것이 세계노동절 정신
1880년대 미국 시카고는 산업이 발달하며 유럽으로부터 많은 이민자가 유입되던 도시였다. 1870년에 이미 시카고 인구 중 절반 가까이는 유럽에서 건너 온 이민자였다. 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린 아래의 법정 최후 진술을 남긴 것으로 유명한 스피이스(August Spies)도 독일 이민자였다.
“만약 그대가 우리를 처형함으로써
노동운동을 쓸어 없앨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렇다면 우리의 목을 가져 가라!
당신은 하나의 불꽃을 짓밟아 버릴 수 있다.
그러나 당신 앞에서, 뒤에서, 사면팔방에서
끊일 줄 모르는 불꽃은
들불처럼 타오르고 있다”
헤이마켓 사건으로 스피이스와 함께 사형당한 아돌프 피셔(Adolph Fischer), 게오르그 엥겔(George Engel)도 이민자였다. 시카고에서 메이데이 투쟁을 주도했던 국제노동자협회는 이민자들이 주축이 된 조직으로 출신, 국적에 따른 차별이 없는 평등한 노동을 지향했다.
당시 미국 사회에는 이민자들이 백인-숙련노동자들의 일자리를 뺏어간다는 반감이 높았다. 이주노동자가 일자리를 뺏는다고 경계하는 오늘날의 한국 사회와 비슷했다. 헤이마켓 사건 이후 불어닥친 전국적 탄압은 메이데이 투쟁을 주도한 세력이 이민자 집단이었다는 사실과도 관련있다. 지배계급은 빨갱이 이민자가 폭탄 테러를 벌였다고 선동했고, 총파업의 열기는 급속도로 식었다. 체포된 8명의 노동운동가도 혐오 광풍 속에서 증거도 없이 재판받고 사형선고를 받았다.
과거의 역사를 돌아보는 것은 현재에 질문을 던지기 위해서다. 만약 헤이마켓 사건이 오늘날 한국에서 벌어진다면, 예를들어 아랍계 이주노동자들이 참여한 집회에서 물리적 충돌이 발생한다면 한국 사회는 어떻게 반응할까? 최근 한국 사회가 이민자에게 보이는 배타적 태도에 비춰보면 130여 년 전 미국에서 불어닥친 혐오 광풍보다 덜할 것이라고 기대하기 어렵다.
당장의 과제이다. 한국 사회에 확산되고 있는 이주민 혐오 정서는 노동운동 내에서도 자유롭지 않다. 민주노총 가맹조직 주최로 미등록 이주노동자를 추방해야 한다는 집회가 전국 각지에서 열리기도 했다. 전북자치도는 인구와 노동력 감소를 해결하기 위해 이주노동자 유입을 늘릴 계획이다. 이주노동자와 내국인 노동자들에게는 공동의 적이 있다. 우리는 이주노동자와 연대하고 공동의 적에 맞서야 한다.
시절이 혼란해도 노동운동이 견지해야 할 입장은 1890년이나 지금이나 명료하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스파이스’로 잘못 불리고 있는 ‘스피이스’의 이름도 되찾아주자. 독일 이민자였던 스피이스의 이름을 올바르게 돌려주는 일은 1886년 메이데이가 이주노동자들의 운동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일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