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진 투쟁과 노동(자) 정치 그리고 평화의 먼 길
김정훈(아래로부터전북노동연대 대표)
2024년 9월 28일 전국동시다발 윤석열 정권 퇴진 투쟁이 열렸다. 현 정권의 민낯이 드러날 대로 드러난 상황이다. 상식은 팽개치고, 부도덕 앞에서 뻔뻔하고, 무능함은 되지도 않을 포장으로 넘어가고, 불법은 은폐하기에 바쁜 정권이다. 지지율이 급락하여 반등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럼에도 윤 정권은 어떤 의제에서도 물러섬이 없다. 현 정권은 자신이 지향하는 바를 알기나 하고 ‘밀어붙이기’에 전념하는 것인지조차 의심스럽다. 대통령의 ‘힘’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신념이라면 신념인 것인가. 되지도 않을 친(부)일역사왜곡 사태를 만들어내어 의료대란을 덮고, 경제 파탄을 덮고, 최악의 외교를 덮고, 한반도의 위기를 조장하는 부부 정권이다. 윤석열 정권 퇴진 투쟁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것이 이상할 상황인 것이다.
그러나 민중은 함부로 일어서지 않는다. 박근혜 정권 탄핵의 경험이 있다. 그것은 어떤 정권도 민중의 성난 파도를 견뎌낼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더 큰 아픈 경험은 말뿐인 정권만으로는 다시 절망을 불러온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사회적 대전환과 변화에 대한 합의 없이 만들어진 표정만 다른 정권교체로는 국민(시민,민중,인민,대중)의 염원이 다시 뭉개진다는 것을 경험했다는 것이다. 윤 부부 정권 퇴진 투쟁은 필요하다. 아니 있어야 하고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정권 퇴진’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 투쟁은 6개월 뒤든 2년 반 뒤든 그때 우리가 최소한이나마 함께 꿈꿀 수 있는 사회가 어떤 모습인지, 그때의 정권은 어떻게 이를 실현할 것인지를 짚어내고 실천해 내는 과정이어야 한다.
보수 양대 정당의 위성정당 기만에 휩쓸려 치러진 두 번의 총선으로 노동(자)정치의 한 막이 내려갔다. 밑바닥인지도 모를 곳에 노동(자)정치가 놓여있다. 분명해진 지점은 보수 야당은 보수 야당의 길이 있고, 노동(자)정치는 노동(자)정치의 길이 있다는 점이다. 민주당 등 보수 야당은 더 이상 진보를 위장하지 말아야 한다. 노동(자)정치는 현실적 요구를 내세우는 데 더이상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노동(자)정치가 필요하면 제대로 된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만들어내야 한다. 이 조건에서 보수 야당과 선을 그을 것은 긋고 타협할 것은 타협할 수 있다. 그 원칙은 노동(자)과 민중의 조건과 이해에 기반해야 한다는 변함 없는 사실이다. 노동(자)정치 다시 시작하자! 보수 야당에 빌붙는 정치는 노동(자)정치가 아니다. 서로의 지리멸렬에 한숨을 짓는 것도, 비판에서 비난으로 돌아서는 것도 이제 그만하자. 현실을 가슴에 모아야 한다.
아리셀 폭발 사고로 숨진 노동자, 쿠팡 등 플랫폼 노동자들의 잇따른 죽음, 생산 및 건축 현장에서의 죽음이 멈춰지지 않는다. 노동 환경은 변하지 않고, 죽음의 노동은 계속되고, 생존권의 위협은 더해만 간다. 노동(자)정치의 복원은 여기에 답해야 한다. 보수 야당도 여기에 답해야 한다. 그러나 패권 추구 보수 야당은 일부 정치인을 제외하고 ‘퇴진’을 박근혜 2탄 정도의 ‘게임’으로 생각하는 것만 같다. 대중의 장단지만 긁어주는 시늉에 그치고, 대중의 썩어 문들어지는 가슴속은 헤아리지 않는다. 여기에 민주노총의 책임이, 노동(자)정치의 책임이 있다. 지금의 전반적인 한국 사회에 대한 현실적인 진단 아래서 출발하자. 법 제도의 완결성이 필요한 섣부른 ‘탄핵 정치’에 갇혀서는 안된다. 구체적인 접근이 요구되는 때이다. 내 주변을 보자. 전주리싸이클링타운 참사와 해고 노동자에 대한 추석 전 노사정 합의가 아직까지 이행되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전주시장과 태영건설 등 사측이 입막음용 언론플레이로 생각하여 ‘합의’를 이행하지 않는 태도를 보인다면, 우리는 이에 대해 단호하게 맞서야 한다. 길바닥에 있는 리싸이클링 노동자들과 단결된 연대 투쟁만이 끝내 승리를 안아올 것이다. 전주리싸이클링 문제는 노동자 해고 문제를 넘어서서 지자체가 책임을 져야할 각종 폐기물 처리와 관련한 공적 영역이다. 시민의 생활과 직결된 환경 문제이기도 하다. 우리의 노동(자)정치는 여기에서도 출발 지점을 찾아야 한다. 노동(자)의 평화는 노동해방에서 온다. 단숨에 오지 않는다.
평화의 길은 멀고 험하다. 2024년 10월 1일 이스라엘이 레바논에 지상군을 투입했다. 이스라엘의 학살 전쟁이 가자를 넘어 레바논으로 향했다. 자칫 전면적인 서아시아 전쟁, 미국을 위시한 이른바 서방이 전면 개입한다면(이미 개입하고 있는 정황이 노출됨) 3차 대전의 불길이 당겨진 것이다. 자국민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네타냐후 정권은 학살 전쟁을 멈추지 않고 있다. ‘씨를 말린다’(제노사이드)고 멸종된 인류의 공동체는 없다. 오직 증오와 학살만 남을 뿐이다. 2024년 10월 1일 윤석열 정권은 북의 열병식과 같은 국군의날 행사를 했다. 이날 윤설열은 ‘북의 종말’을 경고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전쟁 무기가 밀집된 곳의 하나인 한반도의 긴장을 더욱 고조시키고 있다. 정녕 ‘북의 종말’은 ‘남의 종말’을 뜻한다는 것을 모른다는 말인가. 평화의 길은 멀고 험하다. 평화는 공존의 조건을 만드는 데에서 시작된다. 공존의 그늘을 없애가며 만든다. 한 사회 안의 평화에서 국가 간의 평화까지 말이다. 전쟁을 통해 이익을 만드는 자들이 ‘악의 축’이다. 우크라이나, 서아시아,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이스라엘의 학살 전쟁을 반대하는 피켓이라도 들자. 노동해방은 험한 길이고 평화는 먼 길이다.
그러나 나서자. 그 길에 생명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