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으로 걸어온 전북지역 30년

인권으로 걸어온 전북지역 30년

채민 (전북평화와인권연대 상임활동가)

인권은 무엇이고 사회적으로 어떻게 실천되어야 할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해 답하고자 한 것이 인권운동의 역할이었다. 수사적인 말과 제도의 언어로만 규정되는 인권이 아니라 사회구조의 변혁을 끌어내는 보편의 권리로서 인권이 되도록 하는 것, 그것이 인권운동의 역할이었다.

1970~80년대 인권운동의 맹아

남한 사회의 인권운동은 1972년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가 창설이 최초였으나, 실질적으로는 박정희 정권에 맞서 1970년대 반독재-민주주의 쟁취 투쟁 속에서 출발했다고 평가되고 있다. 인권운동의 맹아는 종교계에서 시작되었다. 1974년 4월엔 남한 사회운동가들이 중심이 된 인권단체의 시초로 기록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가 설립되었다. 또한 같은 해 9월, 지학순 주교의 구속을 계기로 발족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역시 인권을 주요한 기치로 하였다. 종교계의 운동은 이후 1984년 전국목회자정의평화실천협의회(목정평), 1987년 민주화를 위한 철야기도를 계기로 만들어진 원불교 사회개벽교무단, 1988년 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천정연) 구성과 천정연 인권소위원회 등으로 이어졌다. 가족운동도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의 구속자 가족들이 모여 구속자 석방을 넘어 민주화를 염원한 구속자가족협의회가 결성되었고 76년엔 양심범가족협의회로 개칭하고, 1985년 12월에는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 설립으로 이어졌다. 이후 가족운동은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생겨난 희생자들의 유가족들이 1986년 설립한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유가협)으로 확대되었다. 전북에서도 1970~80년대에 전북인권선교협의회, 전북목정평, 전북민가협, 천주교전주교구정의구현사제단 등이 인권운동의 기초를 쌓았다.

반독재-민주화운동이 확대되는 과정에서 각계에도 인권을 기치로 삼는 인권운동이 시작되었다. 여성인권운동의 흐름도 80년대에 만들어지게 되었다. 여성시민의 차별과 학대 상황에 대한 지원을 목표로 1983년 6월 여성의 전화가 창립된 이후, 1984년 여대생추행사건대책협의회, 1985년 25세 여성조기정년제 철폐를 위한 여성단체 연합회, 1986년 부천경찰서 성고문사건의 대책위원회 등의 투쟁 속에서 1987년 한국여성단체연합이 정식으로 발족하였다. 법조계엔 유신독재 시기의 시국사건 변론을 담당하던 인권변호사들이 만든 정의실현법조인회, 자주•민주•통일을 목표로 하는 민족민주운동의 한 부문을 자처한 청년변호사회가 있었다. 이러한 흐름은 1988년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출범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1세대 인권운동의 틀이 이렇게 구축되면서 인권운동이 시작되었으나 인권을 고유의 의제로 삼는 운동으로 형성되지는 않았다.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

1세대 인권운동의 성격은 70년대의 민주화운동, 80년대의 변혁운동의 하위, 부문운동으로 기능하였고 주된 의제는 양심수, 고문, 의문사, 실종 등 민주화운동, 노동운동, 통일운동 등 민중운동 활동가들의 인권문제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이는 곧 인권운동이 고유한 이념적 지향과 운동전략 및 의제와 활동방식을 가진 독자적 사회운동으로 자리 잡지 못했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1세대 인권운동이 이런 성격을 갖게 된 것은 당시 사회구조의 성격과 정세의 효과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987년 6월 항쟁과 그 효과 속에서 등장한 문민정부의 출범으로 인한 사회구조의 변동과 정세의 변화는 사회운동 내부에서도 전화의 압력으로 작용하였고, 이는 인권운동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990년대~2000년대, 인권운동의 새로운 출발과 형성

인권을 운동의 고유한 의제와 방향으로 설정한 인권운동의 출발은 1990년대에 들어서며 시작되었다고 평가된다. 1993년에 인권운동사랑방 출범과 다산인권센터의 전신인 다산인권상담소의 개소, 1994년 천정연의 인권위 분리 결정과 1994년 천주교인권위원회의 공식적 독립 그리고 전북평화와인권연대의 전신인 정의평화정보센터 결성 등이 1990년대 초반에 시작되었다. 최초의 동성애자 인권 운동 단체인 초동회 해산 이후 성소수자 단체인 친구사이와 끼리끼리의 출범, 이주노동자 최초의 직접행동인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강당 농성도 94년에 진행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흐름 속에서 남한 사회의 인권운동이 새로운 출발하게 되었다.

한편으로 1990년대는 박정희 정권으로부터 시작된 군사독재정권이 1987년 민주화 쟁취로 종언을 가하고, 문민정부인 김영삼 및 김대중 정부를 경유하며 사회적 분위기 또한 인권운동의 변화를 가져왔다. 남한 사회는 문민정부 수립과 함께 1997년 IMF 사태를 전후로 더욱 가속화 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 맡겨져야 했다. ‘경제위기로 인해 사회전반에서 더욱 기승하고 있는 인권침해와 이른바 ‘인권대통령’의 공존은, 현실에서 가능한지 우리 스스로 의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는 1998년 전북인권보고서의 지적은 당시 인권운동의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

당시의 인권운동은 앞선 시대의 인권운동이 제기해왔던 국가보안법을 비롯한 국가폭력에 의한 인권침해 문제, 양심수 및 비전향 장기수 석방 및 지원활동을 비롯한 교정시설 내 인권침해 문제 등에 대해 대응해왔다. 그러나 인권의 개념과 언어를 벼리는 자체적인 이론의 체계를 갖추며 고유한 영역운동으로 작동했다. 특히 1993년 비엔나 세계인권대회의 참여를 통해 새로운 인권운동을 위한 언어, 개념, 논리 등 즉 이론의 공백을 채워갈 수 있었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1993년 이후 인권운동은 기존의 인권운동 방식, 즉 국가폭력과 반인권적 법률로 인해 발생하는 국가기구에 의한 인권침해에 대한 대응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경향을 탈피하여 인권의제를 더욱 다양화하며 인권운동의 개입범위를 확장해 가게 된 것이다. (중략) 비엔나 세계인권대회 이후 한국의 인권운동은 과거 반독재 민주화 투쟁의 맥락 및 80년대 사회변혁운동의 부문운동이라는 맥락에서 형성된 인권운동의 의제와 방식, 그리고 논리와 문화 등으로부터 벗어나서 새로운 의제, 방식, 논리, 문화 등을 형성해 가게 된 것이다. 또한 비엔나 세계대회대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조직된 KONUCH는 대회 이후 인권협이라는 국내 인권운동진영의 독자적인 상설적 연대체를 결성하는데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다시 말해 비엔나 세계인권대회의 경험이 국내에서 새로운 인권운동의 전개를 위한 조직적 연대의 틀의 형성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후 1998년 정의평화정보센터 역시 전북평화와인권연대로 변경하며 전북지역 인권운동을 실천해왔는데 이 시기를 전후하여 과거보다 확장된 인권침해 문제에 대응하였다. 특히 기존의 사회운동에서 주목되지 못했던 사회권을 비롯한 다양한 인권 의제로 활동영역이 확대되었다. IMF 구조조정과 정리해고제로 인한 여성노동자를 비롯한 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 사회복지법인 동암의 시설내에서 발생한 인권침해 및 비리해결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 결성과 같이 사회복지시설 내 인권침해 문제, 전자주민카드 도입 문제, 학생인권 침해 사건과 같은 청소년인권 등이 인권운동의 활동의 영역으로 자리 잡았다. 또한 평화문제에 있어서 불평등한 한·미 행정협정(SOFA)개정 활동을 중심 내용으로 확산되어 ‘군산미군기지 우리땅찾기 시민모임’이 결성되고 2002년 미군 장갑차에 의한 중학생 사망사건은 평화의 권리에 대한 시민들의 열망을 인권의 목소리로 담아내고자 했다. 무엇보다 김대중 정부에서 추진하던 국가인권기구를 법무부 산하로 만들려는 시도에 맞서 <올바른 국가인권위원회 설립을 위한 단식 농성> 연대 등을 통해 2001년 국가인권위원회가 설립될 수 있도록 함께 했다.

한편으로 인권을 의제로 한 사회운동의 앞선 선례가 없던 시기, 각 인권운동은 서로의 운동을 벤치마킹하고 지원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일례로 인권운동사랑방의 출범과 함께 발행이 시작된 일간지<인권하루소식>처럼 정의평화정보센터 역시 공식 설립 전인 1994년 7월 1일부터 격주 및 주간으로 팩스를 활용해 인권신문<평화와 인권>을 발행했다. 당시 언론의 편파보도 등으로 알려지지 않는 국가권력과 자본에 의한 인권침해의 소식은 전달되지 않았다. 이에 <평화와 인권>은 스스로를 ‘우리 사회의 핵심적인 문제의 하나인 인권문제를 알리기 위하여 존엄을 목표로 지역에서 진행되는 투쟁 소식과 정보교환의 장으로 활용’하는 방향을 설정했다. 또한 서울인권영화제에 착안하여 영화 매체를 통한 인권운동으로서 전주인권영화제가 1996년 시작되어 2005년까지 진행되기도 하였다. 또한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을 비롯한 교육단체들과 함께 인권을 주제로 하는 청소년캠프 등의 사업도 이 시기에 진행하게 되었다.

2000년대에는 들어서는 보다 다양한 영역에서 인권의 목소리가 외쳐지게 되었다. 무엇보다 전북지역 내의 개발이데올로기에 맞선 투쟁의 현장에 인권운동이 함께 하게 되었다. 2000년에는 <새만금 사업 즉각 중단을 위한 전북사람들> 결성을 비롯하여 새만금 사업의 문제에 대한 대응을 함께 했다. 2003년에는 노무현 정부와 부안군청의 일방적인 저준위 핵폐기장 유치 강행과 이를 강제하는 대규모 공권력 투입에 맞선 주민들의 투쟁, 주민투표 운동 등에도 함께 했다. 이는 주민 스스로 환경권만이 아니라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해 질문하게 된 투쟁이 되었다. 한편으로 인권운동은 노동자들의 투쟁에 대한 연대를 하는 과정에서 따돌림과 차별이라는 정신적 고통-직장 내 괴롭힘-의 문제를 사회적 의제로 제기하였다. 인권침해의 피해를 호소하는 KT노동자들과 연대하여 <KT상품판매 전담팀 인권백서>를 인권단체연석회의와 함께 발간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이후 <KT노동인권 전북대책위원회>라는 연대단위 구성으로 함께 하며 2010년대 중반까지 KT노동인권 문제를 통해 이러한 기업의 노동자들에 대한 일터괴롭힘이 의제화 되도록 함께 했다. 청소년인권모임과 함께 학생·청소년인권의제를 보다 심화하게 된 것도 2000년대 중반부터였다. 이 시기 지역 내 청소년인권모임과 함께 학생인권 관련 법률과 두발자유, 니코틴 측정기 도입, 학교 내 CCTV 문제를 제기하였다. 이러한 학교 내 청소년인권 의제는 이후 학생인권조례 제정 운동의 필요성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국가에 의한 자유권의 문제도 계속되었다. 특히 2008년 이명박 정권의 출발과 함께 시작된 불통 정치에 맞선 촛불집회에서 경찰의 집회·시위권리 제한, 민간인 사찰 등 국가권력의 인권침해 문제가 계속되었다. 당시 전북에서는 집회시위를 한 고등학생에 대한 경찰이 수업시간 중 조사를 한 사건이 알려져 국가인권위에 진정을 하게 되었고 인권침해 권고로 이어졌다.

2010년대 인권의 제도화 속 인권운동과 그리고 2020년대

진보교육감 후보를 세우는 운동과 함께 학생인권조례 제정운동이 시작되었다. <전라북도학생인권조례 제정운동본부> 결성을 통해 추상적인 규정만 있는 학생인권보장의 근거를 지방자치규범에서 만들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이명박-박근혜 정권의 학생인권조례 공격, 지역보수적 교육계와 정치권의 훼방에도 불구하고 2013년 전북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되도록 학생, 청소년, 시민들과 함께 했다. 또한 지역사회 제도화에 대한 인권적 관점의 개입도 함께 하였다. 2013년 전북장학숙과 풍남학사에 대한 4년대 대학생 이상으로만 지원 자격을 두는 차별문제에 대해 국가인권위 진정 등을 통해 전북지역 지방자치와 인권제도화에 대한 비판과 참여의 역할을 맡기도 했다.

2010년대 후반을 지나면서는 전사회적인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에 맞선 인권의 옹호자의 역할도 함께 하고자 했다. 특히 박근혜 정권 퇴진 투쟁이후 2017년부터 지역의 인권운동 차원에서도 많은 역량을 집중했던 의제는 포괄적 차별금지법(평등법) 제정운동이었다. 차별금지법 제정의 연대를 위해 기존의 각 영역의 반차별운동을 하고 있던 단위들이 <차별과 혐오 없는 사회를 위한 차별금지법 제정 전북행동>을 결성하여 입법투쟁과 지역사회 내 법 제정의 필요성을 모색하게 되었다. 이러한 반차별 운동의 관점에서 2015 국제성소수자혐오반대의날 공동행동, 2018년 제1회 전주퀴어문화축제 공동집행단위로 연대하였다. 또한 <자림복지재단 사건>을 비롯해 <장수벧엘장애인의집 사건> 등의 시설인권 투쟁, <전북도청 전 인권팀장 사건>, <미투운동> 등 반성폭력 운동과의 연대도 주요한 인권운동의 과제였으며, 학생인권에 대한 사회적 왜곡과 호도, 교사인권에 대한 고민 없는 전북학생인권조례 축소와 졸속적인 전북교육인권조례의 문제제기도 함께 하게 되었다.

한편으로 재난참사에 대한 인권운동의 역할도 2010년대를 지나 2020년대까지 이어졌다. 2014년 세월호 참사 이후 <세월호참사전북대책위> 결성과 특별법 제정을 위한 지역연대 활동이 있었고, 이후엔 대책위 연대 및 공동집행을 비롯해 다른 방안을 모색하게 되었다. 코로나19 팬데믹 같은 재난상황에서 나오는 감염예방대책으로 제기된 차별적 전수조사 문제점, 재난지원의 이주민 차별 문제 등도 새롭게 제기된 의제였다. 2022년 10.29 이태원 참사를 겪으며 <10.29 이태원참사 전북대책위> 참여만이 아니라 <너를 보낸 이태원, 우리가 만난 풍남문>과 같은 피해자 기록작업 등 인권의 목소리를 전달하고자 하는 새로운 길을 찾아가기도 했다.

30, 그리고 앞으로를 위한 질문과 과제

지난 기간 인권으로 걸어온 30년을 대략적으로 훑어보게 된다면 그것은 유연성과 개입성이라고 할 수 있다. 한계가 있지만 90년대 이후 지역사회의 인권운동의 흐름은 인권의 언어를 통해 남한 사회 다양한 영역의 문제와 의제들에 다양한 방식으로 개입해왔다. 전북의 인권운동도 마찬가지다. 남한사회와 세계적인 구조적 모순과 권위주의·자본주의·특권 체제에 대한 저항과 연대를 비롯해 개인의 존엄이 침해되는 사건에 대한 대응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의제에서 활동을 전개했다. 이는 명확한 자기 의제와 이론을 근거로 체계화 된 정형(定型)의 시민사회운동의 결과 달리 돌출되는 인권이슈와 의제에 대응하고자 했던 비정형(非定型)의 운동이기도 했다. 이와 같은 유연성과 개입성은 여타의 사회운동들과 비교해 인권운동이 갖는 매우 독특한 역량이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조직적 규모와 물적인 토대, 인권의 확장성에 비하면 대중적 접근성이 다른 운동에 비하면 부족하다고 할 수 있는 인권운동이 이러한 유연한 개입과 활동성이 인권운동의 길이었다. 특히 전북지역 내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함께 했던 인권활동가들이 인권운동의 길을 만들어 왔다. 그러나 동시에 인권운동의 오늘날 한계를 마주하고 있다.

사회권운동은 철거민, 해고자, 비정규직 운동에 대한 연대투쟁인가? 파업진압이나 강제퇴거 과정에서 인권침해를 조사하고 권리구제를 시행하는 활동인가? 아니면 사회권운동은 신자유주의를 혁파하고 케인즈주의적 경제제도를 수립하는 것일까? 사회적 시장경제를 사회권운동은 지지하는가?이러한 이론적 공백은 전략적 공백으로 이어진다. 이는 특히 반차별운동에서도 나타나는 문제이다. 다수에 의한 차별금지법제정의 반대, 차별을 찬성하는 대중의 결정에 대해서 인권운동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물론 대중의 요구에 굴복하지 않고 반차별운동을 관철해야 가야한다는 원칙을 견지해야할 것이다. 그런데 대중과의 투쟁방식은 국가기구와의 투쟁방식과는 달라야 하지 않을까? 국가폭력에 대한 인권운동의 저항은 암묵적으로 대중의 지지 속에서 이루어졌었다. 그런데 반차별운동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이는 운동의 조건으로서 대중의 정서가 달라졌음을 의미한다.이 문제는 인권운동과 대중과의 관계를 제기한다. 인권운동은 대중운동을 통한 과제 실현 방식보다는 전문적 활동가 중심의 과제 실현을 추구해왔다. 그러나 그 결과 인권운동의 대중적 토대는 부실해지는 상황을 초래한 것은 아닐까? 여론이건 조직화된 대중의 집적행동이건 대중적 의사결정이 중요한 상황에서 인권운동의 맥락에서 자발적으로 또는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대중의 부재는 민주적 과정을 통한 인권가치의 실현을 어렵게 하고 있다. 이는 인권운동과 대중운동간의 관계에 대한 고민이 2세대 인권운동 내에 필요함을 제기한다. 2세대 인권운동은 대중을 보다 적극적으로 조직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이 물음은 활동가중심의 운동만이 아니라 대중을 조직화하는 활동을 강화해야할 필요성을 제시한다고 볼 수 있다.

한국 사회의 운동 인권의 제도화가 시작된 지 20여년의 시간이 지나고 이러한 질문이 들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가고 있다. 더욱이 윤석열 정부 들어 국가인권위원장 및 인권위원 선임 문제 등으로 인해 더욱 심화되고 있는 인권의 기본적 원칙을 뒤흔드는 일들이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인권운동은 어떤 길을 가야할 것인지 더 많은 질문을 마주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앞으로 기본적 가치가 더욱 흔들릴 사회에서 인권운동이 길을 잃지 않도록 무엇을 모색해야 할까. 그 길을 먼저 고민하던 이들의 제안을 함께 나누며 고민을 나눌 수 있기를 바란다.

“인권운동이 만들고자하는 사회는 무엇이며, 인권운동이 전진하는 길은 어디로 나 있는가를 알며, 어떻게 그 길로 나아갈 것인가의 문제, 즉 인권운동의 세계이해와 자기이해의 체계화 역시 우리의 인권운동을 위하여 요청되는 중요한 문제이다. 사회에 대한 정확한 이론적 이해, 자기 운동의 강점과 약점에 대한 명확한 파악, 목표를 이루기 위한 적합한 전략 없이 그저 전진하고자 하는 선의만 앞세우는 것은 불충분하다는 것이다. 나는 지금 인권운동에도 ‘전진하고자 하는 선의’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사물에 대한 정통한 이해’라고 생각한다.”

Post Author: 전북노동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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