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갱이’의 탄생(부제: 여순사건과 반공 국가의 형성)을 읽고

‘빨갱이’의 탄생(부제: 여순사건과 반공 국가의 형성)을 읽고

김연탁(전북노동연대 회원)

1. 서문

필자가 《빨갱이의 탄생》이라는 책을 접하게 된 이유는 2024년 11월 1일 진행된 공공운수노조전북본부 역사기행에 참여한 것이 계기였다.

당시“여수에서 찾는 항쟁의 기억”이라는 주제로 이순신장군의 발자취 답사와 여순항쟁 기념지 답사로 진행되었다. 아침부터 잔뜩 찌푸린 하늘은 버스가 출발하면서 장대비를 퍼부었다. 2023년 하반기 군산 근대문화유산 답사때에도 비가 많이 내렸는데, 공공운수노조 전북본부 역사기행은 비와 참 인연이 깊다.

오전에 진행된 이순신 장군의 발자취 답사는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정적인 건축물과 공간이 각종 사료와 감한민 감독의 3부작 영화(명랑,한산,노량)에서 극대화된 이순신 장군의 감동적인 서사를 채우기는 빈약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점심 먹고 진행된 여순항쟁 답사는 더 굵어진 빗방울에도 불구하고 알찬 시간이었다. 이는 여순항쟁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은 여수고 양홍석 역사교사의 강렬한 열정과 해박한 지식에 전적으로 기인한다.

평일에 하루를 제끼고 간만의 바깥 나들이에 들뜬 조합원들에게 비는 그야말로 최악의 조건이었다. 하지만, 우중답사에 불만을 토로하는 참가자는 거의 없었다. 빗속에서 버스에서 대충 설명해도 될 텐데, 항상 맨 먼저 내려서 조합원들이 다 모일 때까지 장대비 속에서 십분 이상을 기다렸다가 열성적으로 설명하는 안내자의 열정에 탄복했다. 이 답사의 경험이 책을 읽으며 상황을 유추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나중에, 여순항쟁에 대해 강의를 경청하는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순항쟁을 처음으로 접한 것은 대학교 신입생 시절 태백산맥을 통해서라고 기억한다. 그리고, 1999년말 조문익 선배의 소개로 여수지역사회연구소를 방문하여 이영일 소장으로부터 여순항쟁에 대해 설명을 듣고 자료집을 선물 받아서 읽었다. 그동안 군경이 죄 없는 민간인을 학살했다는 사실을 추상적으로 알고 있었는데, 자료집에는 피해자 인터뷰와 인적사항이 적나라하게 드러났고, 군경과 우익에 비해 소수이긴 했지만, 좌익에 의해 죽은 사람들도 기록되어 있었다.

빨갱이의 탄생은 2009년에 양장본으로 발간된 책이다. 분량은 700페이지에 달하고, 책 크기는 크고, 글자 줄간격 자간은 지금 출간된 책에 비해 작다. 연구자 출신의 저자는 자신의 지식과 연구 결과를 책 속에 모두 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한마디로 정독하기 어려운 책이다. 이 무거운 책을 들고 부안에 가서 2025년 설연휴 4일 동안 하루 8시간 이상 읽어서 겨우 정독할 수 있었다. 책을 읽다 보면 잘 넘어가도 기억에서 쉽게 사라지는 책이 있다면, 이 책은 정반대다. 해방정국과 미군정 하에서 민중의 죽음 위에 건설된 대한민국 기득권의 기원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이제 책 속으로 함께 들어가보자.

2. 여순사건 발발과 학살

1) 미군정과 제주 43 항쟁

해방 이후 새로운 나라 건설을 위한 노력이 각지에서 시작되었다. 해방 이전부터 여운형의 주도로 준비되고 있던‘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표면 위로 부상했다. 그러던 중 미군이 한반도 남쪽으로 들어온다는 소식에 여운형은‘조선인민공화국’ 수립을 선언했고, 각 지방에서는 건국준비위원회가 인민위원회로 재탄생했다. 그러나 미군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남한을 직접 통치했다.

다른 지역의 인민위원회가 해체되는 와중에도 제주인민위원회는 오랫동안 지역의 구심이 되었다. 미군정은 1946년 8월 1일 전라남도에 속해있던 제주를 남한의 아홉번째 도로 승격시키면서, 도 행정에 필요한 여러 관공서들을 차례로 세우고, 제9연대도 창설 ․ 주둔하게 하고, 경찰 숫자도 두 배 이상 늘렸다. 1947년 3월 1일 3․1절 기념행사에 제주전역에서 ‘자주독립국가 쟁취’와 ‘친일파 척결’등을 외치며 5만여명이 참여하였다. 특히, 제주 북초등학교에서만 3만여 명이 행사에 참여하였다. 경찰은 시위대에 발포하여 6명이 죽고 8명이 중경상을 입게 된다. 경찰의 정당방위 주장에 분노한 제주 도민들은 3․10 총파업으로 대응하게 된다. 미군정은 경찰과 서북청년단 등 우익단체를 동원하여 빨갱이 소탕을 명분으로 테러와 폭력을 자행한다. 1948년 3월에만 경찰의 고문으로 3건의 사망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에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경, 350여명의 무장대가 오릉에 봉화를 올리며 봉기하게 된다. 봉기대는 단독선거 반대, 통일국가 수립, 친일경찰과 서북청년단 추방 등을 외치며 제주도민들을 탄압했던 경찰서와 경찰, 우익단체회원들을 공격했으며, 5․10선거에서는 제주 3개 선거구 중 2개가 투표수 과반수 미달로 무효 처리되었다.

2) 여순항쟁의 발발 (194810191026)

이승만 정부는 출범 후 본격적으로 제주 4․3 항쟁에 대한 군 투입을 통한 토벌작전을 계획하게 된다. 경남과 경북, 전남에 주둔하고 있던 5연대와 6연대, 14연대에 출동명령을 내렸다. 1948년 10월 19일 출동시간을 목전에 두고 14연대에서 21시경 봉기가 발생했다. 봉기 주도세력(‘제주토벌출동거부병사위원회’)은 성명을 통해 동족상잔 결사반대, 미군 즉시 철퇴 등을 주장했다. 당시, 병사들이 봉기에 가담했던 가장 동감했던 주장은 친일경찰 청산이었다. 미군정 치하에서 국방경비대는 체계상 경찰 산하였다. 그래서, 경찰로부터 무시받고 탄압받았기에 친일경찰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다. 또한 군 내부에서는 반이승만세력에 대한 숙청이 준비되고 있었다. 이는 주로 김구(한국독립당) 지지 세력과 남노당 세력이 대상이었다. 전 14연대장 오동기 중령 역시 한국독립당과 연계되었다는 이유로 연행된 상태였다. 불안감을 느낀 14연대 내 하사관을 중심으로 남노당과의 조직적 논의 없이 독자적으로 봉기를 일으켰다. 당시, 남노당 지역위원회에서는 봉기 이후 조직적 논의를 거쳐 인민대회를 통해 인민위원회 건설에 참여하게 된다. 봉기의 결과 여수․순천․광양․보성․고흥․구례에서 인민위원회가 건설된다. 인민위원회의 경우, 이승만 정부를 부정하고 인민공화국을 지지했으나 여순사건 전체의 흐름이 일관된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거기에는 공산주의적 색채와 함께 경제적 실정, 경찰 같은 통치기구에 대한 반감, 즉 반이승만 정부 경향 등이 융합되어 있었다.

여수 인민대회 결의안 6개항 (10월 20일 오후 3시, 진남관 앞 중앙동광장)
1. 오늘부터 인민위원회가 모든 행정기구를 접수한다.
2. 우리는 유일하며 통일된 민족정부인 조선인민공화국을 보위하고 충성을 맹세한다.
3. 우리는 조국을 미 제국주의에 팔고 있는 이승만 정부를 분쇄할 것을 맹세한다.
4. 무상몰수․무상분배의 민주주의 토지개혁을 실시한다.
5. 한국을 식민지화하려는 모든 비민주적인 법령을 무효로 한다.
6. 모든 친일 민족 반역자와 악질 경찰관 등을 철저히 처단한다.

하지만, 23일 순천, 24일 오후 보성, 25일 벌교(오전), 고흥(오후), 27일 여수, 구례(오후)가 진압되면서 짧은 기간 동안 뚜렷한 활동을 남기지는 못했다. 저항의 핵심 주력 세력은 22일 구례와 25-26일 백운산을 통하여 지리산으로 입산하였고, 남아서 끝까지 저항한 세력은 학생과 일부 시민들이었다.

3) 좌익과 우익의 학살

10월 19일 봉기 이후 좌익에 의한 학살, 진압 이후 우익에 대한 학살 모두 발생했다. 좌익에 의한 학살은 주로 친일파와 한민당, 경찰 등에 집중된 반면, 우익에 의한 학살은 민간인이 대다수였다. 14연대의 봉기 이후 여수인민위원회는 보안서를 구성하여 경찰, 한국민주당,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이승만 지지), 대동청년단, 민족청년단, 서북청년회 등의 우익 정당과 단체원을 검거했다. 보안서는 조사를 통해 거의 대부분을 석방하였으나, 강경파와 온건파 간에 의견들이 부딪쳐 14연대 봉기군 주도 아래 최고 심사위원회를 구성하여 중재하게 된다. 서종현 등 강경파는 봉기군 주력과 당 지도부의 철수 직전인 24일 밤 경찰서 유치장에 가득 차 있던 경찰관에 총격을 가해 집단학살을 저질렀다. 이외에도 우익인사에 대한 개별적인 테러가 자행되었다. 하지만, 여순 학살의 명분으로 삼았던 인민재판이 진행되었다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우익에 대한 학살은 개인적 보복과 응징의 성격이 훨씬 강했다. 우익이나 경찰에 의해 지목을 당하면 바로 학살당하였다. 뿐만 아니라, 진압시 포격 및 방화, 파괴로 인한 각종 건물 및 가옥 소실 등의 피애액이 200억원(전남경찰청 추산)에 이른 것으로 나타났다.

여수지역사회연구소는 1997년부터 2003년까지 여수지역과 순천군 외곽지역(구, 승주군) 두 지역을 대상으로 여순사건 희생자 수를 조사했다. 이에 따르면 여수지역에서 희생된 사람은 모두 884명이다. 이 가운데 좌익(봉기군, 지방 좌익)에 의해 희생된 숫자는 155명(23%)이고, 우익(진압군․경찰)에 의해 희생된 숫자는 531명(77%)이다. 우익에 의한 민간인 희생이 좌익에 의한 희생자에 비해 3.5배가 더 많다. 순천 외곽지역도 이와 비슷하다. 순천 외곽지역에서는 모두 1.320명이 희생당했는데, 이중 231명(22%)이 좌익에 의해 희생되었고, 835명(78%)은 우익에 의해 희생되었다. 희생자 대부분은 10대에서 30대의 소년과 청장년층이었다. 여수지역에서는 전체 희생자의 96%이며, 순천 외곽지역은 84%에 이른다. 여수지역사회연구소는 여순사건으로 인한 인명 피해를 1만명으로 추정한다. 이는 1949년 11월 전남도 당국이 조사한 인명 및 가옥 피해 통계와 거의 유사하다. 여순사건으로 인한 피해자 규모는 여수 5,000명, 순천 2,200명, 보성 400명, 고흥 200명, 광양 1,300명, 구례 800명, 곡성 100여명이며 가해 주체별로 나누어 보면, 국군과 경찰에 의한 학살이 9,500여 명이고, 지방 좌익과 빨치산에 의한 학살이 500 여 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4) 스노우 보고서

이승만 정부는 여순 사건 중 민간인 학살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반공체제의 초석에 대한 명분을 쌓기 위해 진상조사단을 파견한다. 문인들 10명의 인원으로 문인조사반을 구성하여 11월 3일부터 6일동안 시찰을 진행하였으며, 그에 앞서 사회부와 종교단체 대표들로 구성된 합동조사단을 진압 직후인 10월 31일부터 11월 6일까지 파견하였다. 문인들과 종교인들은 짜여진 각본에 따라 반공체제의 나팔수가 되었다. 대다수 언론과 마찬가지로 좌익 봉기세력에 의한 인민재판과 학살을 계속 강조하고 증폭해서 발표했으며, 소설가 정비석만이 중립적 시각을 유지하였을 뿐이다, 특히 김영랑에게는 배신감이 들었다. 일제 말기 총독부의 정책에 협조할 수 없다고 스스로 절필을 선택했던 김영랑은 문인 진상조사단 참가 이후 1949년에 공보처 출판국장이 되었다. 이승만 정권은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계속된 숙청작업을 통해 건설되었고, 여순사건에서 전면적으로 등장한 군경에 의한 민간인 학살은 이후 공산주의 혐의자를 제거하는 하나의 경험과 실례로서 간직되었다. 한편, 이승만은 미군에게 연합조사단을 제의했으나, 미군정은 경제협조처 소속의 스노우를 별도로 파견하였다. 스노우는 파견을 마치고 별도의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스노우 보고서는 여․순 지역 시찰의 결론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첫째, 큰 사무실에 일하는 사람이 하나도 보이지 않을 만큼 지방행정이 마비되어있다. 둘째, 봉기군과 진압군으로부터 식량을 뺏겨 주민들이 고통받고 있으므로 식량문제가 시급히 해결되어야 한다. 셋째, 여수 시내 부흥은 정부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하며 구호물자가 보내져야 한다. 넷째, 인공기가 게양되고, 인민위원회가 설립되고, 식량배급이 된 것에 비추어 볼 때 반란에는 조직적 지원이 있었다. 다섯째, 반란에는 깊은 원인이 있다. 봉기군에 대한 광범한 지지는 정치적 문제로서 대단히 중요하며 가볍게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여섯째, 게릴라 활동의 근거지가 되는 것을 막으려면 강하고 건설적인 조치를 취하여야 한다.

3. 이승만 반공체제의 구축

이승만 정부는 미군정의 지원 아래 남한단독선거에 의해 구성된 정부라는 약점이 있었고, 역사적 이데올로기적 정통성, 실질적인 지지기반과 국민의 지지 역시 미약했다. 따라서, 사회주의 세력, 김구와 한독당, 국회 소장파 세력을 억누를 수 있는 계기가 필요했다. 이 계기가 제주 4․3사건과 10․19 여순사건이었다.

정부 수립 초기 대한민국의 국민 만들기는 세 가지 방식을 통해 이루어졌다. 첫 번째는 압도적인 물리력을 동원한 국가폭력의 사용이었다. 두 번째는 법제적 폭력이었다. 법은 폭력을 감소시킨 것이 아니라, 폭력 사용을 정당화하거나 보완하는 기능을 하였다. 한마디로, 법은 폭력의 화장한 얼굴이었다. 세 번째는 사회․문화적인 측면에서 진행되는 일상적 삶에 대한 통제였다.

1) 국가조직의 재정비

여수가 진압된 지 일주일도 되지 않은 11월 2일, 대구에서 6연대가 또다시 군인 봉기를 일으켰다. 대구 6연대는 다음해 1월까지 세 번에 걸쳐 반란을 일으켰지만, 이 봉기는 14연대의 봉기와는 달리 군대 내부에서의 병사들만의 반란으로 한정되었기 때문에 쉽게 진압될 수 있었다. 이승만 정부는 여순사건과 대구봉기 이후 본격적인 숙군에 돌입한다. 숙군의 대상이 되었던 사람들 중에는 공산주의자들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민족상잔과 국토분단에 반대하는 군인, 반이승만 세력, 숙군 주도층과 사적 감정이 있는 사람들도 포함되었다. 하지만, 숙군 대상자로 선택된 사람들에게는 나중에 어김없이 공산주의자라는 딱지가 붙었다. 숙군의 결과는 엄청난 것이어서 1949년 7월까지 국군 병력의 약 5%에 이르는 총 4,749명이 숙청되었다. 120명중 118명이 만주군 출신이었던 육사 1기생을 제외하고, 2기는 총 196명 중 34명(17%), 3기는 총 286명 중 70명(24%)이 파면당했다. 5기도 39명이 파면당했다. 숙군 이후 부족한 인원은 청년단으로부터 충원되었으며, 1948년 7월, 6만명이던 병력은 1949년 3월, 6만 9,000명으로 증강되었다. 숙군 이후 본격적인 제주 4․3 진압, 국민보도연맹원 학살 등 민간인 학살을 직접 주도하고 시행했다는 점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또한, 1948년 11월 30일 국군조직법이 공포되고, 1949년 8월 9일 병역법이 공포되었다.

학교에는 학도호국단이 설치되었다. 대통령령 제186호로 제정된 ‘대한민국학도호국단규정’(1949. 9. 28. 제정)은 중앙학도호국단 – 시․도 학도호국단 – 부․군․도 학도호국단 – 학교 학도호국대를 조직하도록 하였다. 학교 자체가 군대식으로 조직되었고, 교사와 학생운 군사교육을 받았다.; 1949년 말 학도호국단은 전국의 중학교 이상 1,146개 교, 35만명을 통괄하는 전국적인 학생조직이 되었다.

1948년 11월 현재, 경찰관 총수는 약 3만 5,000명이었다. 여순 사건 뒤 1949년 3월에는 경찰의 수가 4만 5,000여명에 이르렀고, 1950년에 가서는 5만 명으로 증가했다. 경찰은 공식 조직뿐만 아니라 주민들과 밀착되어 정보를 수집하고 좌익세력을 적발하기 위해 반관(半官) 조직인 민보단을 1948년 10월 9일 창단하였다.

이승만정권은 난립되어 있던 여러 청년단체들을 대한청년단(이하, 한청)으로 통합하여 물리력을 확보하고자 하였고, 한청을 군대와 경찰과 유기적 관련 속에 둠으로써 국가 기구를 보강하고자 했다. 1948년 11월 17일, 국민회청년단․대동청년단․대한독립청년단․서북청년회․민족청년단․청년조선총동맹 등의 6개 청년단 책임자들은 이승만을 방문하고 청년단체를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대한청년의용단을 발족하기로 하였다.

국민보도연맹은 1949년 4월 20일 창설되었다. 보도연맹 결성 시기를 즈음하여 발생한 6․6 반민특위 습격테러, 국회프락치사건, 6․26 김구 암살 사건 등 이승만 정권의 6월 공세는 반이승만 세력에 대한 공세였다. 원래 보도연맹은 좌익 전력을 가진 사람들을 사상적으로 개조하는 데 그 취지가 있었다. 하지만, 상부로부터의 할당에 따라 좌익 활동경력이 없음에도 강제로 가입한 사람이 많았다. 한국전쟁 발발 전까지 보도연맹원 수는 약 30만으로 추산되고 있다. 하지만 6․25 전쟁이 발발하자 보도연맹원들에 대한 예비검속과 집단학살이 자행되었다. 학살자는 약 10만명으로 추정된다.

2) 반공체제의 법제 정비

1948년 10월 22일 여순사건 진행 중 현지사령관에 의해 계엄이 발포되었다. 여수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기 시작한 10월 25일에는 ‘국무회의 의결’을 통해 정식으로 공포되었다. 또한, 그 이후에도 수 차례 토벌과정과 제주에서도 계엄이 발포된 적이 있다. 모두 헌법 위반이다. 「계엄령」은 일본이 조선을 강제로 지배하기 이전인 1882년 태정관 포고 제36호로 공포되었으나, 해방 이전에는 한 번도 발포된 적이 잆었다. 계엄법은 1949년 11월 24일 제정되었다. 제헌 국회의원들은 계엄이 정치적 의미나 계엄 발포 그 자체의 정당성을 끝까지 추궁하지는 못했다. 남한만의 단독선거로 선출된 198명의 의원들은 기본적으로 반공 이데올로기를 공유하고 있었다. 계엄은 계엄 상황에서 벌어지는 기본권의 제약, 집행자의 자의성도 문제이지만, 더 큰 문제는 계엄이 해제된 뒤라도 계엄의 사회적 영향이 사라지지 않고 지속된다는 데 있다. 계엄상황에서 군대는 행정, 사법 권력을 독점하며 계엄사령관은 모든 민간당국의 상위자로서 역할을 수행한다. 이는 대중으로 하여금 독재에 적응하게 하며, 사회는 군대 논리에 점자 포섭되고 굴복된다.

국가보안법은 여순사건이 가져온 충격과 진압작전의 경험을 밑바탕으로 1948년 12월 1일 만들어졌다. 대중적 봉기로서의 여순사건은 정부와 국회에 체제 위협의 위기감을 증폭시켰고, 이러한 위기감이야말로 한 달 만에 국회에서 급박하게 국가보안법을 탄생시킨 배경이었다. 준전시 상태에서 내려졌던 계엄을 평상시로 연장시키는 수단이었고, 여순 진압작전에서 벌어진 일들을 전 사회로 파급시키는 것이었다. 국가보안법은 전장(戰場)의 논리를 일상으로 확대하였다. 1949년 한 해동안 전국적으로 국가보안법으로 인해 검거된 사람은 4만 6,373건에 총 11만 8,621명이었다. 이 중에는 국회의원 19명, 법조계 11명, 언론계 31명이 포함되었다.

국가보안법 제정 당시 국회(출처 : KBS)

3) 사회의 재조직화일상적 통제체제의 구축

여순사건이 어느 정도 진압된 후, 공보처는 공산주의자들의 잔학성을 폭로하고 공산주의의 허구성을 알리기 위해 여러 활동을 시작했다. 1948년 11월 18일, 공보처는 선전대책중앙위원회를 조직하였으며, 전 공무원조직을 활용하여 시도까지 확대하였다. 정판사위폐사건, 국회프락치사건 등을 선전하여 남로당과 공산주의에 대한 적개심을 일으키게 하는 한편 연극각본검열(1949년 7월 15일), 각 도별 연극 각본과 영화대본 검열(1949년 9월 19일), 반공다큐멘터리 제작 및 공연등을 시행했다.

1948년 12월 26일 ‘국민회’로 명칭을 바꾼 대한독립촉성국민회는 대한청년단, 대한부인회 등 소위 ‘애국 3단체’를 중심으로 ‘국민운동’을 표방하면서 ‘관민일체가 되어 반공태세 강화와 국가보강을 위한’국민운동을 전개할 것을 천명했다. 1949년 10월 1일부로 서울시의 애국연맹이 해체되고 국민반이 발족하였다. 각 국민반은 10호 내지 20호를 단위로 구성하고, 국민반은 최소한 월 1회 이상 반상회를 개최하게 하였다. 매 세대는 ‘국민운동’의 주축인 국민회, 대한청년단, 대한부인회의 유지비로 매년 총 400원씩을 납부하였다. 신생활운동 등의 국민운동은 국민이 먹는 것, 입는 것, 시간을 사용하는 법까지 규제하면서, 이를 구가의 시선에 따라 규율하고자 하였다. 신생활운동이 제시한 규율은 모든 국민에게 내면화되면서 국민적 양심의 기준으로 작용하였다.

유숙계 제도는 전 주민을 대상으로 한 감시체제의 정점을 보여주었다. 유숙계란 유동인구 파악을 위해 외부 사람(부모․형제․자매 포함, 정부요인 및 애국정당단체간부 제외)이 거주자의 집에 묵으면 반원(세대주)이 소속 반장에게 신고하고 반장은 유숙인의 본적, 현주소, 여행 목적, 세대주와의 관계 등을 정해진 양식에 따라 적어 파출소에 신고하도록 한 제도를 말한다. 이는 일제 강점기 조선기류령에 기인하지만, 훨씬 통제가 강하다. 경찰은 시행 직후인 1949년 8월 한 달동안 유숙계 신고를 위반한 3만 6,796명을 적발했으며, 이들 중 1,163명이 과료처분, 182명이 구류처분에 회부되었다.

4. 결론: 극우파의 재집권과 준동을 막아야 한다

1948년의 반공주의가 겨누는 대상은 공산주의자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반이승만 성항의 정치인, 일반 대중 더 나아가 정치 이데올로기와 전혀 관련이 없는 사람들까지 포함하였다. 반공주의는 빨갱이와 양민이라는 이분법으로 공산주의자를 비인간으로, 국민의 구성원이 될 자격이 없는 이단으로, 불구대천의 원수와 악마로 취급하였다. 그리고 비인간화, 악마화 과정은 대량 학살로 발전하였다. 종교적 서사로 덧씌워진 노골적 국가폭력은 ‘대중들에 대한 공포’를 ‘대중들의 공포’로 전환시켜 뼛속 깊이 각인시키는 방법으로 (시민이 아닌) 국민들을 형성해갔다. 이런 측면에서 이승만 정권의 반공주의는 공산주의를 겨냥하고 있다기보다는 저항 가능성이 있는 대중을 상대로 하고 있었다. 이승만 반공체제는 사실상 대중억압 체제였던 것이다. 윤석열의 내란은 이러한 이승만의 통치전략을 놀랍도록 비슷하게 답습하고 있다.

77년이 지난 2025년 우리 사회는 계엄정세가 전개되었다. 우리가 그동안 기반을 단단하게 다졌다고 생각했던 민주주의는 모래성임이 드러났고, 어느 한 개인에 의해 이렇게 쉽게 유린될 수 있다는 공포를 체험하였다. 또한 민주주의의 가치는 많은 이들에게 부정되고 있으며, 그들의 목소리는 탄핵 이후에도 여전하다. 우리는 1948년에서 한 치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2016∼2017년 박근혜 정부를 끌어내린 만취감에 취해있는 사이에 이승만 정부를 계승한 수구세력들은 이데올로기와 경제적 진지를 강화하고, 민보단을 구성하고 청년단을 통합시키듯 단일한 대오를 형성하였다. 저들은 일제 강점기 불세출의 독립투사였던 홍범도 장군 흉상을 육군사관학교에서 철거시키려 했고, 백선엽의 친일 경력을 삭제하려고 했다. 저들이 얼마만큼 성장했고 강해졌는지 우리는 윤석열 탄핵정국에서 우리는 입을 다물지 못하고 목도하였다. 중요한 사실은 수구세력의 투표에 의한 집권과 계엄과 같은 도발은 언제 다시 재발해도 이상하지 않다는 것이다.

지금 현시기 전세계적으로 극우파가 득세하고 있다. 해방정국의 비극은 2차 대전 이후 전개된 전 세계적인 체제 대립과 반공주의 득세에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해답은 내부에 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과 프랑스에서는 자발적으로 다양한 지역단체를 결성하려는 운동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다고 한다. 나치가 사회를 지배하게 된 원인을‘대중적 토론의 부재(집단지성의 부재)’로 결론짓고 이를 복원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한국사회도 1987년 민중항쟁 이후 노조 민주화투쟁과 다양한 시민사회단체 결성 활동, 진보정당 결성 노력이 활발해졌다. 극우파세력의 준동과 재집권을 막는 사회의 자정능력을 회복하기 위해 힘과 의지, 지성을 모을 때이다.

Post Author: 전북노동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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