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음모론은 어떻게 진실을 무너뜨리는가
– 버스 파업의 기억
문주현(회원, 책방 토닥토닥 지기)
온전히 슬퍼할 수 없었던 2014년 4월, 그리고 지금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결코 잊을 수 없는 아픔이자 슬픔입니다. 동시에, 그 아픔을 ‘온전히’ 슬퍼할 수 없었던 날이기도 합니다. 전북지역의 버스노동자들과 활동가들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온 사회가 세월호 참사의 충격에 휩싸였을 때, 그들은 또 다른 분노 속에서 처절한 싸움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싸움은 진기승 열사의 죽음으로 이어진 버스 파업 투쟁이었습니다. 세월호 참사 무렵, 진기승 열사와 밥을 함께한 적이 있습니다. 긴 해고 기간의 억울함을 토해내던 그의 말을 위로한 건 소주잔 부딪히는 소리와 동료들의 손길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해갈될 수 없는 분노가 있었습니다. 바로 ‘부당해고’였습니다. 그건 열사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같은 시기, 운송수입금 착복이라는 누명을 씌워 해고를 감행했고, 파업에는 ‘불법’ 딱지를, 시위에는 ‘폭력’이라는 낙인을 찍었습니다. 세월호의 비극 앞에서도, 노동자들은 ‘생존권’을 위협당하며 슬퍼할 겨를도 없이 싸웠습니다. “내가 목 매라고 했냐”는 사업주의 망언에 분노했던, 그것이 전북지역 사회운동이 기억하는 2014년 4월입니다.
“온전히 슬퍼할 수 있었다면…” 세월호 유가족과 당시 노동자들, 분노와 슬픔의 무게만 다를 뿐 그 결은 닮아있지 않았을까요? 정부는 유가족을 ‘폭도’라 규정했고, 전주시는 버스노동자들의 파업을 ‘불법’이라며 분노했습니다. 청해진해운과 선원들은 도망쳤고, 버스 사업주들은 침묵했습니다. 해경은 구조에 실패했고, 전북 경찰은 진압에 집중했습니다. 일부 시민들은 유가족에게 ‘이제 그만하라’고 외쳤고, 또 다른 시민들은 파업을 불편해하며 노동자들을 외면했습니다.
그 시기, 유가족과 노동자들은 가족과 동료의 죽음을 ‘온전히’ 슬퍼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분열과 혐오, 조롱을 불러온 건 바로 ‘음모론’이었습니다.
버스 파업 당시에도 있었습니다. ‘민주노총 전북본부가 민주당과 야합을 시도하고 있다’는 허위 주장이 퍼졌습니다. 이 주장은 농성 장소를 ‘시청’이 아닌 ‘노조 사무실’ 앞으로 돌리라는 요구로 변질 되었습니다. 노동자들의 분노는 사업주가 아닌 노조 지도부로 향했습니다. 그런 음모를 퍼뜨린 자들은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일부 조합원들에게 ‘힘 있는 이야기’로 인정받았습니다. 그 힘은 사업주에 맞서기보다는 내부를 분열시키는 에너지로 작용했습니다. 물론 그 ‘음모론’이 단결한 조직된 노동자들의 힘을 넘어서지는 못했지만, 소모적으로 힘을 낭비하는 데는 작은 역할을 했습니다.
최근 개봉한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다큐 <침몰 10년, 제로썸> 역시, 이런 음모론의 맥락 위에 놓여 있습니다. 이 다큐는 ‘세월호 잠수함 충돌설’을 전면에 내세웁니다. 그리고 그 잠수함은 미군 핵잠수함이며, 이를 은폐하기 위해 정부·해경·검찰이 공모했고, 미국이 문재인 정부와 윤석열 당시 검찰총장에게 직접 개입했다는 의혹까지 제기합니다. CIA 국장이 윤석열을 ‘다음 대선 후보’로 지목했다는 말까지 나옵니다. 이는 사실상 대선 개입 음모론입니다.

이들은 이를 ‘의혹 제기’ 혹은 ‘합리적 가설’이라 주장하지만, 그 논리 구조는 2014년 전북 버스 파업 때의 음모론과 매우 닮아 있습니다. 그 양태는 진상 규명을 방해합니다. 실제로 이 ‘잠수함 충돌설’을 주장한 이들은 세월호 선체조사위원회,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 등 국가 기구에서 조사 책임을 맡았던 인물들입니다. 이들은 선체에 난 손상 흔적을 근거로 잠수함 충돌을 주장했지만, 국내외 전문가들은 해당 손상이 내부 요인으로도 설명 가능하다고 밝혔습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조사기구 내부의 합의를 무산시키고, 현재는 자신들이 만든 조사 결과를 조롱하며 다시 ‘재조사’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물론 세월호 참사에 대한 재조사를 반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거짓을 바탕에 둔 재조사는 또 다른 진실의 왜곡이 될 뿐입니다.
‘거짓의 바탕 위에 슬퍼할 수 없다’는 말은, 세월호 참사와 전주 버스 파업 모두에 해당되는 말입니다. 전주 버스 파업이 8년이라는 시간을 버티고 싸워낼 수 있었던 건, 음모론이 아니라 동료들의 삶과 죽음, 분노와 기쁨, 고통과 연대가 모여 이뤄낸 결과였기 때문입니다. 비록 완전공영제는 이뤄내지 못했지만, 전주의 대중들에게 공공성의 중요성을 각인시킨 투쟁이었습니다.
세월호 참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천만 서명, 유가족들의 단식과 농성, 전국적인 추모 물결, 촛불의 외침들… 그 모든 건 “이전과는 달라야 한다”는 사회적 각성이었습니다. 그래서 유가족들이 요구한 ‘생명안전기본법’은 단지 법 하나가 아닙니다. 또 다른 재난을 막기 위한 사회적 안전망이자, 우리가 함께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약속이었습니다.
그 약속은 거짓 위에서 세워질 수 없습니다. 우리는 끝까지, 진실 위에 슬퍼하고, 기억하고, 싸워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