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판만 남은 문재인 정부의 인권정책
차별·혐오세력이 사회적 소수자들에 대한 혐오 선동을 ‘표현의 자유’며 ‘인권’이라며 자행하는 참혹한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이들은 영역과 의제 그리고 지역을 넘어 인권정책만이 아니라 지자체의 인권 관련 조례까지 표적으로 공격하고 있다. 혐오세력은 조례나 제도의 내용에 상관없이 ‘인권’과 ‘성평등’이라는 단어만 들어가도 전면적으로 공격하고 있다. 혐오세력만이 문제가 아니다. 이들을 등에 업으려는 정치세력들도 문제다. 작년 11월 21일, 자유한국당을 비롯해 정당을 막론하고 여야 국회의원 44명은 국가인권위원회법상의 차별금지 사유에서 ‘성적지향’을 삭제하고 성별 이분법을 강화하는 국가인권위원회법 개악안을 발의했다. 이 개악안 발의에 전북지역에서는 익산 지역구 조배숙, 전주 지역구 정운천이 참여했다. 발의 의원들은 실제 개악안을 통과시키는 것에 목적을 두지 않았다. 2020년 총선을 염두에 두고 혐오세력에 대한 ‘자기 홍보’를 톡톡히 했다.
혐오 선동의 문제는 가볍게 볼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인권의 문제, 그중에서도 사회적 차별은 에티켓의 영역도 아니며 감수할 수 있는 불편함도 아니다. 차별은 사회가 우리에게 가하는 상흔이며 생존을 위해 해결해야 할 문제다. 일터 내에서 차별을 겪고 있는 여성 노동자들, 그중에서도 차별을 차별이라고 표현하지 못하는 여성 노동자들이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더 아프다고 말하고 있다. 학교 폭력의 피해를 본 다문화가정 청소년 중 ‘별다른 생각 없이 그냥 넘어간’ 남학생들이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더 많이 아프다고 말한다. (김승섭, 2017)
게다가 차별은 단면적이지 않다. 자본주의 구조는 장애, 이주민, 난민, 성소수자, 비정규직 등의 다양한 소수성들을 연결시켜 더욱 복합적인 차별로 작동시킨다. 이를 통해 소수자에 대한 배제를 정당화하고 분열을 만들고 있다. 더 심각한 것은 한국사회가 차별과 혐오가 사람간의 관계를 넘어 사회 전반에서 광범위하게 선동되는 위험 상황에 있다는 점이다.
자칭 촛불정부도 나서지 않는 차별금지 정책
차별 문제의 해결을 위한 책임의 무게는 공공의 영역에 있으며, 현재의 핵심적인 인권의 과제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정부와 정치권의 절대다수는 차별금지법의 제정 논의는커녕 혐오세력의 선동을 방관적·수용적 태도로 대하며 수수방관하고 있다. 2007년 노무현 정부가 인권의 가치가 훼손된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려 했던 시도를 겪으며, 인권운동·반차별운동 단위들은 시민사회와의 협의를 통한 <포괄적 차별금지법>의 제정 요구를 지속하고 있으나 답변 없는 외침이 되고 있다.
특히 가장 큰 책임이 있는 문재인 정부에서 인권정책은 간판만 있는 개점휴업 상태와 같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 대선에서 여러 인권정책을 언급하기도 했었다. 실제로도 인권 분야에서 과거보다 진전된 정책들도 있었다. 그러나 앞서 말한 것처럼 현 정세에서 가장 중요한 반차별 정책은 외면하고 있다. 당장 대통령 본인부터가 차별금지법 제정을 공약했던 2012년 대선 당시보다 후퇴된 입장을 계속 보인다. 문 대통령은 2017년 정국에서 반차별 입법정책이 불필요하다는 견해를 밝힌 것을 비롯해 임기 내내 소수자 차별을 정당화하는 발언들을 해왔다. 이는 고스란히 정부 전반에도 반영되었다. 일례로 여성가족부 주최로 2019년 11월에 열린 <가족 다양성 시대, 현행 법령의 개선과제> 포럼에서 여가부 차원에서 성소수자를 차별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비단 반차별 정책만이 아니다. 현 정부의 인권정책은 일말의 진전은 있었지만 조금 더 들여다보면 적폐 정권과 크게 다르지 않다. 문재인 정부는 촛불정부를 자임하며 주요 비전 중 하나를 ‘함께 잘 사는 나라’로 세웠다. 그러나 이러한 말이 무색하게 인권정책 또는 정책 내의 인권 실현은 거의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 단적으로 문재인 정부 국정과제 중 ‘국민 인권을 우선하는 민주주의 회복과 강화’의 정책으로 약속한 인권기본법은 임기 절반을 넘어선 지금도 입법 준비를 위한 사회적 논의조차 제대로 진행되지 않고 있다. 그러면서도 외교부는 지난 2019년 10월 한국이 다섯 번째 유엔인권이사회 이사국으로 선출됐다며 대대적으로 보도 자료를 발표했다. 이런 상황을 통해 보면 현 정부에 있어 인권정책은 ‘빛 좋은 개살구’로 빗대어 얘기할 수 있을 정도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절과 다르지 않은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
빛 좋은 개살구를 넘어 후퇴된 영역도 있다. 노동기본권에 대한 공격과 노동법 개악은 대표적인 사회권 정책의 퇴행이라 할 수 있다.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차별철폐 정책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상황은 2018년에 발표된 제3차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이하 인권기본계획)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National Action Plan, NAP)은 국제사회의 합의로 각 국가가 5년마다 국제사회의 인권기준의 국내이행을 포함한 인권의 증진을 위해 마련하는 제도다.
2007년부터 시작된 인권기본계획은 이명박-박근혜 정권을 거치며 사실상 무력화 되었던 터라, 문재인 정부의 인권정책 전반을 담게 되는 제3차 인권기본계획에 많은 관심과 기대가 모일 수밖에 없었다. 이런 관심 속에 문재인 정부는 제3차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 수립을 위해 2018년 초부터 18회에 걸쳐 인권 및 시민사회단체들과 분야별 간담회를 진행했다. 이 과정이 순탄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정부가 인권기본계획 수립 과정 중 최초로 분야별 간담회 시행 등의 긍정적인 모습도 있었다. 최소한 촛불 정부로서 이전 정부보다 진전된 안을 기대하기도 했다.
그러나 법무부가 2018년 4월에 공개한 제3차 인권기본계획 초안은 시민사회의 의견은 물론 UN과 국가인권위원회의 권고도 상당 부분 반영이 되지 않았다. 인권 및 시민사회 진영의 강력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결국 초안의 핵심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그해 8월에 제3차 인권기본계획으로 발표되었다. 이 기본계획은 차별철폐의 관점에서 본다면 박근혜 정부 인권기본계획과 비교해 후퇴된 부분도 있었다. 사회적 약자의 범주에 “성소수자”를 삭제했으며, 인권운동과 국제사회가 지속적으로 필요성을 제기한 차별금지법 제정 역시, “국민여론과 시민사회의 첨예한 대립이 있는 상황”이라는 설명만 있을 뿐 인권기본계획에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박근혜 정부시절에 작성된 인권기본계획 초안에서조차 적어도 성소수자를 사회적 약자로 명기는 하고 있었다는 것을 비교하면 이전 정부와 큰 차이는 보이지 않고 있다. 아울러 모든 노동자의 노동3권의 보장, 한국기업의 인권문제 등 다른 인권분야에서 특별히 진전된 내용이 발표된 것도 아니었다.
국내적인 평가만이 아니라 국외의 평가 역시 비슷한 상황이다. 2019년 9월 유엔 아동권리위원회는 “차별금지법을 신속하게 제정하고 해당법을 통해 출신지, 성적 지향 및 성 정체성에 근거한 차별금지를 보장할 것”을 권고했다. 차별금지법 제정 권고는 이미 2007년부터 국제인권기구에서 지속해서 나온 사항이지만 또다시 한국 정부의 차별철폐 정책이 부족함이 국제적으로 재확인된 것이다. 유엔 사회권위원회 유엔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권리규약 위원회1UN Committee on Economic, Social and Cultural Rights의 약칭.를 통해서는 문재인 정부가 인권정책의 진전 의지가 없음이 확인되기도 했다.
사회권위원회는 2019년 12월 9일 대한민국 정부에 보낸 서한을 통해서 2017년에 전달한 주요 권고 사항인 한국기업의 해외 인권,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 노조할 권리 보장 등 3가지 권고에 대한 이행 모두 “진전 불충분(insufficient progress)”이라는 평가를 전달했다. 위원회는 ▲기업과 인권 관련하여 “인권 실천 및 점검 의무를 수립하지 않음” ▲포괄적 차별금지법 입법은 “이행되지 않았으며, 가까운 시일 내 계획도 없는 것으로 보임” ▲노조할 권리는 “단체교섭 권리와 단결권이 계속하여 침해 중” 이며 “ILO 제87호와 제97호 협약의 구체적 비준 일정을 제시하지 못함은 유감”이라고 언급하며 한국정부에 권고한 인권정책에 모두 부정적 평가를 했다. 이와 같은 국제사회의 기본적 권고조차 이행하지 않으면서 유엔 인권이사회 이사국 선출을 내세우는 데 뻔뻔하다는 비판이 이어지고 있다.
지역사회에서 반차별 운동을 만들어 가자.
비록 상황은 여의치 않지만, 혐오·차별은 회피할 수 없는 문제가 되었고 차별금지법을 비롯한 적극적인 인권정책의 중요성은 점차 커지고 있다. 이러한 인식은 정부조차 다르지 않다. 문제가 된 제3차 인권기본계획에서조차 “최근 사회적 약자를 대상으로 하는 비하, 혐오 발언 및 범죄행위가 발생하므로 그 원인과 대책에 따른 사회적 논의와 예방책 마련 필요”함이 명시되었다. 정부 스스로 반차별 정책의 필요성을 인지하고 있으나 총선 이후에도 변하지 않은 채 지지율 관리에만 골몰하게 되지 않겠냐는 우려가 든다.
결국 사회운동이 시민들과 연대해 광범위한 반차별 운동을 만들어 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다양한 소수성이 차별되지 않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정부와 국회의 책무임을 분명하게 주장하는 반차별 운동을 지역사회에서부터 함께 만들어야 한다. 다가오는 4월 총선 기간에 혐오세력과 야합하는 정치권의 선동에 대해 규탄하고 차별금지법을 제정을 촉구하는 지역사회 반차별 운동에 힘을 모으는 것이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말하지 못한 내 상처는 어디에 있을까>, [아픔이 길이 되려면]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