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충우돌 전원일기
교직생활 30년 동안 초임 무주 여중을 시작으로 대 여섯 학교를 거쳤지만, 그중에서도 전주공고는 나에게 인생 후반부의 즐거움을 안겨준 참 고마운 학교이다. 9년 전 삼례에서 근무를 마치고 옮긴 전주공고는 개교기념일이 5월 1일인 것부터 마음에 들었다. 노동절이 학교 생일이라니! 생각해보면 교육과정이 노동자를 길러내는 특성화고이니 어쩌면 당연한 것 아닌가! 한 두어 달쯤 적응 기간이 지나자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샘이 조언이라며 ‘6년이면 또 옮겨야 하는 학교, 기왕에 전주공고에 왔으니까 나갈 때 두 가지를 들고 가’라는 것이었다. 한가지는 학생들 틈에 끼어 굴착기를 배워두라는 것과 두 번째는 전국적으로 알아주는 관악부가 있으니 악기를 하나 익혀가라는 것이었다. 짧은 생각에, 당장 땅 한 뼘도 없는데 굴착기와는 평생 인연이 없을 듯했지만 어설픈 연주에도 주위에 여자가 꼬인다는 말에 색소폰은 꼭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터넷 사이트를 뒤져서 구매한 중고 색소폰에 빠져 하루에도 몇 시간씩을 입술이 부르트도록 불어댔다. 아시겠지만 색소폰은 정말 큰소리를 내는 악기이다. 다행히도 전주공고는 아주 넓은 학교여서 일과 후에 구석 별관에서 밤늦도록 나팔을 불어댈 수 있었지만, 주말이면 색소폰 중독에 빠져 산과 들, 다리 밑 여기저기에서 배회하는 인간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그리고 한 달 반 정도가 지난 일요일 아침, 급한 연주 때문에 연습을 위해 아이에게 피아노 반주를 부탁하고 최대한 작은 소리로 십여 초를 불었을 뿐인데 전화벨 소리가 울리고 관리실이라며 혹시 악기 불고 있느냐며 민원이 들어왔다고 말했다.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집사람에게 “소소한 문화생활 하나도 할 수 없는, 에이 이놈의 아파트 살 곳이 못 돼”라며 어디 시골로 집을 지어 들어가자고 말했다. 아직 중, 고등학생인 아이들의 불만을, 전주에서 멀리 나가지는 않을 거라고 설득하고 여러 부동산에 요청하여 드디어 서너 달 후 구이 광곡리에서 맹지 정도의 가격이지만 입지와 전경이 마음에 딱 맞는 땅을 운 좋게 만날 수 있었다.
느닷없는 공사라는 것을 잘 아는 가까운 사이인 건축업자는 최대한 저렴하게 지어 달라는 말에 그러자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워낙 예정에 없이 시작한 일이라 예산은 턱없이 모자랐고 여기저기 싼 이자를 찾아 부채를 증가시키며 드디어 10여 개월의 공사 기간을 거쳐 입주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러는 사이에도 퇴근 후 집회가 없는 날이면 거의 매일 집사람과 함께 인부들을 위한 약간의 간식을 사 들고 가서 우리가 설계한 집이 조금씩 모양을 갖춰가는 것을 보는 것도, 그리고 아저씨들이 퇴근하고 나면 공사장 한쪽에서 마음껏 색소폰을 불 수 있던 것도 큰 즐거움이었다.
입주 후 처음 3년 정도는 좌충우돌 시행착오의 연속이었고 매년 여름이면 몸무게가 3~4kg씩 줄어들 정도로 농사(?)는 만만한 게 아니었다. 처음부터 농사짓는 평수를 줄이기 위해 닭장 펜스도 넓게 두르고 많은 면적을 잔디밭이며 진입로로 덮었지만, 전체 면적이 천 평이 넘다 보니 농사는커녕 예초기 하나 돌리는 것만으로도, 시골에 살아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좀 과장하면 장마가 지난 뒤 빛의 속도로 자라는 풀은 지난주에 깎은 풀 자리가 이번 주에 깎을 풀보다 더 자란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서너 시간씩 예초기를 돌리고 나면 손이 수전증에 걸린 것처럼 덜 덜 떨리고 굴착기로 밀어 만든 생짜 밭은 바위(?)만 한 돌 천지여서 관리기가 앞으로 나가는 못하고 뒤로 튀어 밀리기 일쑤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삼 년여가 지나자 황무지 돌밭은 덤프트럭으로 쏟아부은 마사토와 닭장에서 나온 왕겨 퇴비로 카스텔라처럼 보슬거려서 관리기없이 호미만으로도 갈 수 있게 되었고 양파며 마늘 그리고 참깨 들깨 고추 등 어지간한 작물들은 모두 밭에서 나는 양으로 충당하고 주위 사람들과 나눌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농사는 매년 마다 시행착오의 연속이어서 “다른 밭 농작물은 저리도 크고 튼실한데 우리 작물은 왜 항상 작냐”라는 핀잔에 “다른 밭작물은 옆에서 보고 우리 작물은 위에서 보니까 그래. 남자들은 목욕탕 가면 다 알게 되는 이치야”라고 둘러대지만, 농사라는 것이 작목마다 달라서 일 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 일이라 주위에서 심어놓은 것을 보고 나서야 밭 준비에 들어가는 나로서는 늘 시기를 놓치게 마련이고 올해도 남들이 모종으로 심은 배추를 보고 나서야 씨앗으로 파종한 배추와 봄동은 한 달 이상 늦은 것이어서 지금도 밭에서 막 새싹 단계를 벗어나 손바닥만 하게 크고 있는 중이어서 관상용이라고 둘러댄다. 그래도 올해는 세 번째 시도 만에 무들은 알량했지만 맛난 단무지에 성공했고, 청양고추를 설탕에 재워 만든 고추 젓갈도 식구들의 후한 점수를 받았다. 또 몇 년째 쥐들로 인한 병아리 참사의 문제를 오리 합동 사육의 간단한 방법으로 해결한 (정말 우연히^^;;) 나 자신이 대견스럽다.
최근 집사람의 “당신은 참 부지런해”라는 말에 나는 스스로 부지런하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 고개가 갸우뚱해졌다. 다만, “지금 하는 일들이 너무 재미있어서 나중 언젠가는 이 재미진 일들을 못 하게 될 날이 반드시 올 터인데, 그날을 생각하면 이러한 소소한 즐거움을 마음껏 즐길 수 있는 지금이 얼마나 소중하냐는 생각이 전원생활 9년 차에 접어든 요즈음 들었노“라고 했더니, ”참 기특하다.“며 계속 열심히 하라고 추키어준다.
물론 치열한 노동 현장에서 그리고 매일 집회와 투쟁을 조직해야 하는 많은 활동가 동지들에게는 이런 호사를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면구한 일이기는 하다. 그래서 광곡리에 처음 입주하면서 집사람과 몇 가지 다짐한 것 중의 하나가 ‘집회 참석은 모든 일에 우선 한다’라는 것이었고 실제로 인문계고인 순창으로 학교를 옮기기 전까지 거의 모든 집회에 집사람과 함께하려고 노력했다. 언제가 반드시 오겠지만, 노동 세상 좋은 날이 어서 와서 존경하고 사랑하는 많은 동지들도 나와 같은 호사를 누릴 수 있기를 꿈꾸어 본다.
– 색소폰 불려고 시골로 들어왔는데 농사가 훨씬 더 재미있어 나팔은 뒷전이 되어 버렸고 여자는 각시 외에 한 명도 꼬이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