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전국노동자대회를 앞두고 전태일평전을 다시 읽다
제가 전태일 평전을 처음 접한 것은 1988년 초겨울 외가의 책장에서였습니다. 다른 책들과는 달리 달력으로 포장되어있는 책을 호기심에 꺼냈습니다. 책의 제목은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이었습니다. 그렇게 꺼낸 책을 그 자리에서 몇 시간동안 한 번에 다 읽었습니다. 너무 울어서 눈이 퉁퉁 불어 외할머니와 외숙모가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리고, 1992년 대학 입학 후 전태일평전은 저의 책장을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지금도 제 책장에는 세 권의 각기 다른 전태일평전이 나란히 꽂혀있습니다. 제가 다섯 번 이상 읽은 책은 세 권이 있습니다. 철학에세이, 태백산맥, 전채일평전입니다. 철학에세이는 제가 대학 입학 후 가입한 동아리가 ‘철학연구회’였습니다. 가장 먼저 접하게 된 커리큘럼이 철학에세이입니다. 각종 동아리 세미나, 학습세미나, 변증법 교육 등을 위해 탐독했습니다. 태백산맥은 10권으로 된 소설입니다. 가난한 대학생이 한 질을 통째로 사는 것은 무리였습니다. 그래서, 아르바이트로 일주일에 두 권씩 총 5주에 걸쳐 구입한 책입니다. 처음에는 너무 재미있어서 하루 밤에 2권을 모두 독파하고, 일주일동안 기다렸습니다. 그러다가 분량을 정해서 읽었습니다. 제가 큰 일을 잘 끝내고 스스로 뿌듯할 때, 태백산맥을 읽습니다. 전태일평전은 태백산맥과 반대입니다. 운동에 대한 회의가 들거나 나태해졌다고 느낄 때, 진로에 대한 고민이 들 때 전태일평전을 읽습니다.
전태일 평전을 읽으며 항상 스스로를 반성하게 됩니다. ‘열사가 전사에게’란 민중가요와 맥을 같이 합니다. 항상 가난과 사투를 벌이며 생존(삶)에 집착하다가 노동운동을 경험하며 끝내 삶을 초월한 순교를 택한 노동자와 그 노동자의 삶과 죽음을 3년동안 찾아다니며 애정어린 시각으로 되살린 한 수배자의 영혼과 노력, 그리고 그 아들의 삶을 대신 살아온 어머니의 절절한 사연은 보는 내내 가슴으로부터 올라오는 먹먹함을 넘기고 눈물을 참느라 생침을 삼켰습니다.
전태일평전은 제가 알기로는 지금까지 네 번 출간되었습니다. 돌베개 출판사에서 1983년, 1991년, 2001년 세차례, 그리고 2009년에는 (사)전태일기념사업회 출판사업부에서 출간되었습니다. 책을 반복해서 읽으며 처음의 감정을 다시 느끼는 것은 어렵습니다. 하지만, 스물 세살의 젊은이가 이 땅의 에 새긴 노동자의 한과 절규의 역사는 철없이 나이만 먹은 저의 눈물에도 많은 감동을 줍니다.
첫 번째 감동은 전태일 열사의 아버지 전상수씨의 죽음이었습니다. 술에 취해 어머니 이소선씨와 전태일 열사의 형제들에게 일상적인 술주정과 폭력을 행사하고, 술을 사먹기 위해 집안 세간마저 다 팔아먹는 등 무능한 가장이었습니다. 저는 그것이 노동조합파업 과정에서 겪은 트라우마의 영향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대구의 한 방직공장에서 전평(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의 조합원으로 파업에 참여했던 전상수씨는 사업주의 위장폐업과 경찰의 주동자 검거, 그 과정에서 동료의 배신으로 인해 파업이 깨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인생을 포기할 정도로 큰 상처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전태일 열사는 아버지에 대한 반항으로 수없이 가출을 하게 되지만, 결국 아버지 역시 전체의 일부로 포용을 하게 됩니다. 전상수씨는 전태일 열사가 노동운동을 하려는 것을 적극적으로 만류합니다. 하지만, 아버지를 통해 전태일열사의 노동운동의 의지와 지식은 더욱 성장하게 됩니다. 결국 죽음의 순간 전상수씨는 트라우마를 극복하게 됩니다. 그는 부인인 이소선어머니에게 “당신…… 남편은 잘못 만났지만 아들 하나는 잘 둔 것 같애. 그놈 하는 일 너무 말리지 마오…….” 라는 말에 그 뜻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p.141-142, 158-159 참조) 우리 노동운동에는 수많은 무명 노동자들의 피와 땀이 배여있습니다. 하지만, 그로 인한 상처와 고통은 스스로 감내하거나 가족에게 전이한 채 사회에서 ‘무능력자’, ‘주정뱅이’로 천대받습니다. 그리고, 죽음으로 이러한 고통을 마감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상처’를 개인적인 문제로 치부하지 않고, 어떻게 우리의 문제로 포용할 수 있을까 고민이 필요합니다.
두 번째 감동은 1970년 8월 9일 죽음을 결단한 일기를 읽을 때입니다. 1970년 4월, 전태일 열사는 삼각산 교회신축공사에 자청하여 참여하게 됩니다. 4개월만에 결국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로 결론을 내립니다.(p.237 참조) 한국의 역사는 유난히 많은 생떼같은 목숨이 많이 희생되었습니다. 198090년대 수많은 젊은 학생들은 스스로가 민주화의 불을 지피는 불쏘시개가 되어야 했고, 이를 김지하 시인은 조선일보에 ‘죽음의 굿판 걷어치워라’는 글을 통해 학생들의 희생을 폄하하고, 민족문학작가회의는 ‘표류하는 배는 닻을 내려라’는 반론을 내는 등 논쟁이 벌어집니다. 2000년대는 노동자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참여정부가 출범하는 2003년에는 배달호 열사를 시작으로 수많은 노동열사들이 죽음의 행렬에 동참합니다. 이를 노무현 전 대통령은 ‘분신으로 투쟁하는 시대는 지났다.’는 말로 노동자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습니다. 전 세계 노동운동사에서 이렇게 많은 노동자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례가 있을까요? 어느 누가 목숨을 끊고 싶겠습니까?
전태일 열사는 짧은 생애동안 삶에 대한 깊은 애정과 애착을 지녔습니다. 남다른 학구열, 그리고, 삶에 대해 충실하려고 노력하는 태도를 증명하는 많은 기록과 정리, 현실을 끊임없이 극복하려는 시도와 희망, 그리고 가치관을 정립하고 현실을 정의하려는 노력(p61, 66, 238 참조)이 그 증거입니다. 이러한 삶에 대한 성실함과 애정, 희망이 전태일 열사를 노동운동으로 이끕니다. 노동자로서 그의 꿈은 ‘기술을 배워 가난에서 벗어나는 것, 학업을 계속하는 것, 그리고 ‘밑지는 생명들’을 위하여 무언가 보람 있는 일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모두 현실을 바꿀 때만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전태일 열사는 현실을 바꾸기 위해 삶을 포기합니다. 전태일 열사의 삶과 철학은 붓다의 가르침과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느낍니다. 불교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인 연기(緣起,세상 만물은 서로 연관있다), 무아(無我, 나(소유욕, 집착 등등)를 극복한다)에서 특히 동질감을 느낍니다. 그리고, 한 노동자가 이를 결단하는 과정에서 감내했어야 하는 번뇌와 고통이 저의 가슴을 사정없이 때립니다. 그리고, 노동운동이 ’희망‘을 제시하지 못하는 시대, 현실을 바꾸고자 하는 나약한 노동자의 선택이 ’죽음‘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무서운 책임감과 질책으로 다가섭니다.
세 번째 감동은 지난 2011년 9월 3일 향년 82세로 임종하신 이소선 어머니입니다. 한 인간이 23년이라는 짧은 삶을 살면서 얼마나 위대할 수 있는지는 조영래 변호사와 이소선 어머니가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조영래 변호사는 수배중에 전태일열사의 행적을 찾아다니며 전태일평전을 집필하였습니다. 조영래 변호사의 맑은 영혼과 혼신의 노력, 전태일 열사와의 혼연일치와 세상변화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통한 완벽한 재현을 통해 탄생한 책이 전태일평전입니다. 하지만, 이른 시기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이제 전태일열사가 죽어가면서 한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마라!”라는 유언은 어어머니가 이어받았습니다. 이후, 41년동안의 삶 전체를 전태일열사를 대신하였습니다. 이소선 어머니는 서울법대 학생장으로 장례를 치루겠다는 학생들의 시신 인수 요청을 허락합니다. 그리고, 이는 노동현장의 실태를 알리고, 학생․종교․언론의 투쟁을 촉발시키는 계기가 됩니다. 그리고, 전태일 열사 사후 한 달여만에 청계피복노조를 만드는 투쟁부터 시작하여 41년동안 전태일 열사를 대신하여 노동운동을 지켜오셨습니다. 불편하신 몸으로 2010년 전국노동자대회에서 ‘내가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정규직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가 단결했으면 좋겠다.‘는 말씀이 귀에 선합니다.
전태일열사 정신계승! 2019년 전국노동자대회가 다가옵니다. 박근혜정부를 끌어내렸던 촛불투쟁의 마중물이자 그 자체였던 노동운동이 한국사회 개혁이라는 목표를 앞에 두고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문재인정부의 노동개악에 발목이 잡혔는데도, 이를 단호하게 뿌리치지 못하고 자꾸 고개를 돌려 문재인정부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전태일열사와 조영래변호사, 이소선여사분의 희생과 염원이 응축되어있는 전태일열사의 정신 계승을 민주노총이 진정으로 결의하는 계기로서 전국노동자대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