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국 판소리꾼, 고양곤 회원과의 대화

시국 판소리꾼, 고양곤 회원과의 대화

편집팀

투쟁이 있는 곳이라면 항상 함께 했습니다. 때로는 기득권세력을 향한 벼락같은 호통으로 속 시원한 카타르시스를, 때로는 감미로운 기타 선율과 하모니카를 곁들인 노래로 위로를 건네주던 고양곤 회원을 만났습니다. 올 12월이면 31년 동안 재직하던 도립국악원에서 정년퇴직하게 됩니다. 하지만, ‘운명’과도 같은 문화예술운동을 계속하고자 합니다.

1. 판소리에 입문하기 전

고양곤 어린이, 고양곤 학생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중학교 때까지는 순하고 착했다. 공부도 잘했다. 초등학교때 IQ검사를 했는데 136이 나왔다. 음악, 미술, 웅변등 상을 휩쓸고 다녔다. 끼가 많았다. 그러다가, 중학교 3학년때 기타를 처음 접했고, 고등학교 1학년 가을소풍 에서 친구들 앞에서 연주했다. 친구들에게 환호와 찬사를 받았으나, 한편으로는 또 다른 인생의 시작이었다. 음악이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전자기타를 배우고, 친구들과 그룹사운드를 결성하여 함께 놀았다. 그룹사운드를 함께했던 친구들과는 지금도 만나고 있다.

취미와 꿈은 무엇이었습니까?

한 가지에 꽂히면 ‘적당히’가 없었다. 승부욕이 남달랐다. 기타도, 당구도, 화투도 그렇게 배웠다. 집에서 유일하게 나만 술을 먹는다. 한마디로 음주가무에 최적화 되었다고나 할까?
별다른 꿈은 없었다.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것이 좋았다.
한 가지 꿈이라면, 대학가요제에 나가 가수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대학교 시절은 어땠습니까? 꿈은 이루셨습니까?

중앙대 연극영화과를 진학하려고 했다. 가수가 되려면 연극영화과를 진학해야 하는 줄 알았다. 우겨서 원서를 썼다. 원서 접수하러 야간열차를 타려고 집에서 나오는 데, 어머니가 눈물 바람으로 만류하였다. 사립대 등록금낼 형편 안되니, 전북대에 가라고. 그래서, 82년도에 전북대 농대를 입학했다. 1학년 때는 공통계열이고, 2학년때 축산학과를 선택했다. 하지만, 학과 공부는 뒷전이었고, 고등학교 때 결성한 그룹사운드 활동에 열을 올렸다.
84년도에 대학가요제 도예선에 참여했으나 떨어졌다.
당시에는 일등만 결선 무대에 오를 수 있었다. 그룹사운드 연주회를 끝으로 3학년 마치고 군에 입대했다.

2. 국악인, 전북도립국악원 단원, 문화예술운동가로의 한 길

국악인이 된 계기는 무엇입니까? 도립국악원에 입단하게된 경과에 대해 설명해주세요.

원래부터 판소리에 관심이 있었다. 다른 애들이 대중가수의 음악을 들을 때, 나는 명창들의 판소리 테이프를 구입하여 들었다. 군 생활을 35사단 훈련소 조교로 근무했다. 당시 대학교 1 ,2학년은 교련이 있었고, 1학년 때는 지방부대, 2학년 때는 전방부대에 5박 6일 동안 입소하였다. 그런데, 한 번은 우석대 국악과 학생들이 입소하였다. (당시, 우석대 국악과는 83년에 신설된 도내 유일한 학과였다.) 장기자랑을 하는데, 거기서 창을 하는 학생들 보고 반했다. 그래서, 당시 그 학생에게 가사를 받아서 혼자 연습하기도 했다. 87년 7월 군 생활을 마치고, 88년에 4학년으로 복학하였다. 그때, 전북대에 국악과가 생겼다. 편입할 마음도 있었는데, 3학년으로 편입해야 하기 때문에 집안의 만류로 못했다. 88년 5월, 국악원에 연수생으로 등록했다. 6개월이 지나면 중급반이고, 중급반 1년이 지나면 전문반으로 승격하게 되어 있었다. 그때, 나를 지도했던 분이 스승으로 모신 故 이일주 명창이시다. 졸업 후에도 영업직으로 취직을 했기 때문에 시간을 내서 열심히 수업을 들었다. 그러던 중, 92년 2월에 도립국악원에서 입단오디션을 통해 채용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래서, 선생님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도립국악원에 입사했다.
하지만, 동기들은 모두 늦어도 중학생 때부터 판소리를 시작한 국악과 출신이었다. 나이도 많고, 전공자도 아닌 연수생 출신이어서, 보이지 않는 벽이 있었고 실력 차도 커서 나 스스로도 위축되었다. 첫해에는 공연은 서지 못하고, 동료들 연습하고 공연하는 것을 지켜보기만 했다.
그러면서 밤낮으로 열심히 연습했고, 이듬해에 춘향전 공연에서 방자 역할을 맡았다.

중간에 도립국악원을 사직했다가 다시 입사한 걸로 알고 있는데, 어떤 사정이 있었나요?

작장동료에게 연대보증을 섰다. 여러 명이 함께 섰는데, 내가 3,500만 원이 물려 있었다. 그래서 96년 후반부터 급여에 압류가 들어왔다. 너무 힘들어서 98년 8월에 예술단을 사직하고 2개월 뒤 비록 비상임이지만 압류가 없는 교수부 강사를 선택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국악원 민간위탁 파동으로 2001년 12월 31일부로 모든 상임직원이 해고되었다. 사실상 직장폐쇄나 다름없었다. 노동조합이 만들어진 계기이기도 하다. 해고 투쟁이 끝난 후에 결원이 많이 발생하여, 2002년 5월 13일 다시 오디션을 통해서 예술단에 재입단하게 되었다.

늦게 결혼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 부인과는 어떻게 만나서 결혼하였나요?

결혼을 안 하려고 했다. 집안사정도 그렇고, 가진 것이 없었다. 그래서, 선생님이나 지인이 추천해주는 사람들과의 만남을 한사코 거절했었다. 아내와 처음 만나게 된 계기는 1994년이다. 당시, 대형창무극 ‘춘향전’을 대전 엑스포, 삼성문화회관 등에서 공연했는데, 아내는 창작 극회 소속 분장담당으로 공연에 함께하였다. 원래는 서울에서 활동하다 그 시기에 전주에 내려와서 만나게 된 것을 보면 인연이라고 해야 하나? 이후에도 국악원의 크고 작은 공연이 있을 때마다 분장으로 자주 만나게 되었고, 2000년에 결혼하게 되었다.

2001년에 도립국악원 노조를 만들게 되었는데, 배경은 무엇이었나요? 당시 관기 논란도 있었는데, 그 이야기를 좀 해주세요.

유종근 도지사가 종종 사적으로 단원들을 불러서 공연을 시켰다. 늦은 저녁시간에 관사에서 공연을 하는가 하면, 당시 국악원 3층 공연장에 부인의 동문들을 초청한 자리에서 공연을 하기도 했다. 그래서, 민간위탁 투쟁 중에 관기 문제를 폭로하여 큰 파장을 일으켰다.
2000년 후반부터 등장한 도립국악원 민간위탁 문제가 2001년 본격적으로 추진되는 과정에서 예술단이 먼저 저지투쟁에 돌입했고, 내가 속한 교수부는 몇 달이 지난후 투쟁대열에 합류하게 되었다. 당시 나는 비상임 강사 임에도 교수부의 비대위 공동대표에 이어 상임대표를 맡아 활동했었다. 하지만, 결과는 12월 31일부로 ‘전원 해촉’이란 통보를 받아, 모든 단원들이 길거리로 나앉게 되었다.
지난한 법정싸움이 시작되었다. 지노위와 중노위에서는 승소했지만, 도청 측에서 법정소송을 하는 바람에 1심에서는 패소하고 연차수당만 인정받았다. 노조는 즉각 항소했다. 당시, 항소심 재판부는 당연히 해고사건이기 때문에 행정심판으로 진행해야 함에도 1심이 민사재판으로 진행된 것에 곤혹해하며 고민 끝에 화해조정안을 제출했다. 당시, 유종근 도지사는 민주당 대통령선거 경선에 참여하는 중이었다. 그래서인지, 끝까지 간다는 입장을 번복하고 화해조정안을 받아들였다. 노조도 당시 재정이 바닥났고, 단원들은 4개월째 임금을 못 받았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다. 화해조정안 내용은 『1. 4개월간의 임금 정산 없이 5월 1일부로 재위촉 형태로 업무에 복귀한다. 2. 1심 재판부가 인정한 연차수당은 지급한다.』였다. 해고기간 4개월 때문에 근속이 이어지지 않는 것은 또 다른 아픔이기도 했다. 2000년에 결혼해 2001년 11월에 큰딸이 태어났다. 태어난 지 겨우 두 달도 안 되어 직장에서 쫒겨나서, 카드 돌려막기로 4 개월을 버텼다. 당시 연차수당을 받게 된 조합원들은 받은 금액의 50%를 노조에 납부하여 이를 특별회계로 적립했다.

도립국악원노조 위원장을 역임하고, 노조탄압으로 다시 지부장을 맡게 되고, 2021년까지 계속 지부장을 하셨습니다. 그 경과를 말씀해주십시오.

노동조합이 설립되면서 계속 간부활동은 하고 있었다.
국악공부를 체계적으로 하고 싶은 마음에 2002년에 대학원에 입학하여 4학기를 이수하였고 졸업논문과 실기 완창만을 남겨두고 있던 시점에 위원장 출마 권유를 받게 되었다. 처음에는 완곡하게 거절하였다. 하지만, 선거가 미뤄져서 자칫 노동조합의 기반이 흔들릴까 우려되 어서 결국 위원장에 출마하였고, 임기를 무사히 마쳤다.
후임 위원장의 임기인 2007년부터 전북도청과 어용원장, 도의회, 언론이 공모하여 국악원노조를 탄압하였다.
그 와중에 양순용 선생님이 돌아가셨고, 예술단 단장들이 추동하여 전직 위원장들을 포함하여 조합원 30명 정도가 탈퇴하게 되었다. 사실, 탈퇴 규모가 더 많을 거라 생각했으나, 중심을 잡고 있는 조합원이 생각보다 많았다. 중간에 지부장(2006년 9월 30일 공공노조가 출범하였고, 전북도립국악원노조는 공공노조에 가입하면서 지부로 편재됨)이 사퇴하였고, 비대위원장을 역임하게 되었다. 그때도 출마자가 없어서 결국 재출마하여 2021년 말까지 지부장을 역임하게 되었다.

전북문화예술지부를 건설하셨습니다. 가장 어려운 점이 무엇이었습니까?

전북도립국악원지부는 몇차례 통합에 대해 실패한 경험이 있다. 공공노조 시절에 문화예술지부 가입 투표에서 부결되기도 하고, 공공노조전북본부 산하에 있는 전북평등지부, 전주시립예술단지부, 전북도립국악원지부 통합 선거에서 부결된 적도 있다. 그래서, 먼저 전주시립예술단지부와의 통합에 신경을 많이 썼다. 예술단을 순회하면서 설명회를 가졌는데, 시립에서는 도립국악원 지부장인 제가, 도립에서는 김성택 현 문화예술지부장 (당시 전주시립예술단지부장)이 설명을 하였다.
2014년 11월에 전북문화예술지부가 탄생하였고, 처음 1년은 공동지부장체계로 운영되었다. 그리고, 임기 3년의 단일지부장을 연임하고 2021년 임기를 마쳤다. 익산시립예술단과 군산시립예술단에 이어 남원시립국악단이 조직변경을 통해 가입했고, 비슷한 시기에 전주문화재단과 한국전통문화전당이 가입하여 7개 지회 500여 명 규모의 지부가 되었다. 분야도 다르고, 직종도 달라서 서로 함께 모이는 기회를 많이 만들어야 하는데, 코로나 때문에 타격이 있었다. 서로의 이질감을 없애는 것이 이후의 과제이지 않을까 생각된다.

쥐박이 타령 및 백세인생 등 히트곡이 많으신데요. 원래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으셨어요?

대학 3학년을 마치고 군 입대를 할 때까지 데모에 참여 하거나 화염병 한 번 던지지 않았다. 친구들과 어울리거나 오직 음악에만 관심이 있었다. 지금은 작가지만, 당시 그룹사운드 멤버 중에 싱어를 맡았던 이광재라는 친구는 그룹 내 유일한 운동권이었다. 88년 4학년이 끝나갈 무렵 그 친구로 인해 새길청년회에 가입하게 되면서, 가치관과 시야가 달라졌다. 이후 노동조합 대표를 역임하고, 다른 사업장들과 연대하면서 훨씬 폭이 넓어지고 깊어졌다.
쥐박이 타령은 2008년 광우병 쇠고기 파동 때 당시 전북 민예총 이종진 사무처장의 권유로 최기우라는 친구가 가사를 써서 처음으로 탄생하였다. 그리고, 이명박이 일을 저지를 때마다 가사는 업그레이드 됐다. 전북도립국악원 노동조합을 널리 알리고, 시국판소리꾼이라는 별칭이 붙는 계기가 되었다. 가장 기억이 남는 무대는 서울 광화문 국민촛불 해단식에서 20만 명 앞에서 부른 ‘백세 인생’이다. 소리꾼이 언제 그럴 기회가 있겠나?

3. 인생 3막, 정년퇴직 이후를 준비하며

정년퇴직을 앞 둔 심정은 어떠세요?

아직은 담담하다. 시원섭섭하다.

정년퇴직 후 계획이 있다면?

사실, 1~2년 전에 정년퇴직 이후에 할 일을 준비한 적이 있다. 공부하여 1차에 합격했는데, 그 뒤에 유야무야되 었다. 집요한 성격이어서 파고들면 될 텐데 선뜻 마음이 내키지 않더라. 기회가 된다면, 문화예술일을 계속 하고 싶다.

취미가 무엇인가요? 정년퇴직 이후에 어떻게 지내고 싶으 세요?

음악 말고 다른 취미도 갖고 싶다. 꼰대 소리 듣지 말고, 아름답게 늙어가고 싶다.

살아오면서 지켜온 좌우명이나 원칙이 있을까요?

비겁하게 살지는 말자.

현재, 가장 고민은 무엇입니까?
경제적인 문제다. 아이들도 늦고, 어머니도 요양병원에 있어서 치료비 부담이 크다. 둘째가 대학교 1학년 마치고 군 복무 중인데, 그래도 졸업할 때까지는 책임져야 된다고 생각한다.

노동연대 회원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

코로나 거리두기 3년의 여파인지, 예전에 비해 정도 없고 참여도 적은 것 같다. 사안이 없어도, 꼭 집회 장소가 아니더라도 자주 볼 수 있으면 좋겠다.
갈등이 있더라도 서로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끈끈함을 잃지 않고 인간미 넘치는 조직이 되었으면 좋겠다.

마치며

힘들고 무모했지만 낭만도 있었던 시절을 함께한 분들이 이제 어느덧 정년퇴직을 맞이하여 하나 둘씩 현장을 떠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재치와 해학 속에서 죽봉과 같은 깨달음을 주는 판소리와 감동이 있는 노래를 계속 들을 수 있기를 희망해봅니다.

Post Author: 전북노동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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