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만나는 게 좋았지” – 강태연 회원 인터뷰

“사람 만나는 게 좋았지” – 강태연 회원 인터뷰

편집팀

최근에 몸이 안 좋아서 쉬셨다고 들었다.
2004년도에 목 디스크가 심해서 걷지를 못할 지경이어서 산재 신청하고 조금 회복돼서 일을 해왔다. 내가 처음 서울에서 일할 때 가죽 재단하는 데로 갔었다. 거기서 일할 때 원단을 어깨에 메고 3층까지 올라갔다 내려갔다 계속해야 했는데 그때부터 충격이 있었겠지. 2022년에 저림 증상이 심하게 와서 재요양으로 나갔다. 수술했는데 신경을 건드려서 왼쪽 팔이 마비가 왔다. 수술을 한 번 더 하고 6개월 후에 팔이 올라갔다.

고생이 많으셨다. 지금은 회복된 건가?
지금도 고개 양쪽에 핀을 박고 있으니까 고개 돌리는 것도 불안하고 운전하기도 조금 두려운 상황이다.

노동자로서의 삶

원래는 노동조합 어떻게 시작하게 됐는지부터 질문하려고 했는데 이야기 나온 김에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 들려달라. 어떻게 서울로 일하러 가게 되었나?
익산에서 고등학교 다니다가 취업 나갔다. (졸업하기 전에 현장 실습?) 그렇지, 그렇게 해서 나 말고 먼저 나간 사람들도 있고, 학교 선배들도 거기 있더라고. 선배들도 많이 가니까 똑같은 데로 보낸 거지. 서울이 여기보다 더 일자리가 많고 그러니까.

피혁업체에서 어떤 일을 일했나?
작업하는 것은 전태일 열사 일했던 곳이랑 똑같아. 재질만 천이 아니라 돈피 그런 거 있잖아. 그러니까 가죽 재단하는 데 따로 있고 미싱하는 데 따로 있고 그런 거지. 그때는 밤새고 오는 것은 태반이었다. 기숙사 생활을 했으니까 진짜 아침 8시 출근해서 파란색 체육복 벗고 잔 거 입고 그대로 출근했다가 저녁 12시에 들어와서, 그때까지 일했다.
1987년도에 갔는데 87년 대투쟁 어쩌고 그건 아무 생각도 안 난다. 한 게 없으니까. 그런데 나중에 와서 생각해보니까 그때 노동조합이 생기려고 한 것까지는 아닌데 24만 원 주기로 하고 들어갔는데 23만 원 줘 가지고 (작업) 거부 비슷한 건 한 것 같다.

그렇게 가서 거기서 몇 년 정도 일했던 건가?
한 3년 정도 일한 것 같고 다음에는 양재동 뻐꾸기 시계 만드는 곳으로 갔다. 시계 만들 때 이렇게 모양 있는 종이를 붙여야 된다. 그럼 3M(접착제)을 여기다 막 뿌린다. 그때는 유해물질 그런 게 어디 있나. 이런 구석에 들어가서 마스크도 없이 3M 막 뿌리고. 말 잘 들으면 뻐꾸기 시계 하나 주고 그랬다.

그러다 다시 전북으로 내려온 건가?
서울에 있다가 1995년도에 여기 회사(현대자동차)가 생긴다고 그래서 고민을 많이 했다. 여기 들어올 때는 기숙사도 있고 통근버스도 있고 다 있다고 해서 왔는데 (막상 오니까) 그런 게 어딨나? 정규직들만 기숙사 있지 비정규직은 기숙사가 어딨어. 내려와서 집이 없으니까 어머님 고향(으로 갔는데) 김제에서 출근하시는 분이 있었다. 그분 아니었으면 출근 못 했을 거다.

노동조합을 만나다

1995년부터 현대자동차 하청업체에서 일했던 건가?
2004년 그 무렵까지도 업체가 계속 바뀌고 그랬다. 길게를 안 했다. 현대자동차가 부장급들이나 이렇게 소위 말해 직책이 좀 있는 사람들이 잘리면 업체를 많이 줬다. 그러니까 업체 줄려면 누구 하나를 내보내야 되니까 업체 사장 중에 누구 하나 기간 되면 내보내고 그 자리에 들어오고 그랬다.

당시에는 고용이 불안정했을텐데 산재신청은 고민되지 않았나?
고민은 많이 했다. 그런데 조금 눈을 뜬 게 노동조합 관련해서 조금씩 얘기가 나온 때니까. 교육 받은 게 머릿속에 없었으면 상상을 못했지. 그래서 산재라는 게 업체 때 아마 내가 처음이다. 그래서 내가 일대 노안 부장이었다.

노동조합을 처음 만나게 된 게 2004년 무렵인가?
한참 하연투(현대차 전주공장 하청노동자 연대투쟁위원회) 만들 때가 2004년도였다. ㅎ형 따라서 한 번씩 가고 그 다음에 사람도 좀 만나고. 그때 ㄷ형 집도 한 번씩 가고. ㄷ형네 집을 ㅎ형이랑 갔는데 거기서 뭐 파티 비슷한 걸 하더라고. 임성희 국장님도 그때 거기서 뵙고 그렇게 된 거다. 옛날에 익산 노집(노동자의집) 행사 있을 때 한 번씩 가서 보고했는데, 진짜 말 그대로 선생님이었다.

하청노동자연대투쟁위원회 동지들과 함께(2004년) [출처:강태연]

그때가 산재 요양으로 입원해 계실 때였다.
병원에 입원했다가 저녁에 조용히 빠져나와서 책자 들고 교육받고 조용히 들어오고 그랬다. 술을 못 마시니까 운전을 내가 했다. 그러면서 운전을 많이 배운 거다. 교육받는 장소로 민주노총전북본부도 가고, 관통로 근처에 교회가 하나 있었는데 이름은 모르겠다. 거기서 주로 모임을 했다. 회의하고 작전 짜고 뒤풀이하고 가는데 나는 술을 안 마시니까 그날 얘기한 것을 기억하는 거고 일부 사람들은 술 마시고 기억을 못하는 거고. (웃음)

어떻게 노동조합으로 전환하게 되었나?
노동조합을 만들기 직전이니까 각 업체별로 노사협의회를 만들었다. 만들어서 안건을 낼 거 아니야. 수당을 올려달라, 회식을 시켜달라, TV를 바꿔달라, 회사에서 안 하잖아. 그러면 우르르 가서 덤벼버렸다. 그때는 회사에서 이렇게 단체 행동할 줄 몰라서 깜짝 놀랐다. 노사협의 잘 된 샘플은 다른 업체에도 가지고 올라가서 협의해서 따냈다. 노사협의회 위원들이 힘이 셌다.

당시에 비정규직이 몇 명 정도였나.
업체가 14개인가 업체당 60~70명 정도. 대략 1,000명. 당시 정규직이 2,500명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1차 업체고 마바나 이런 데는 2차 업체인데 우리는 처음에 마바가 있는 줄도 몰랐다. 나중에 노동조합 만들면서 노동조합 출입문에 비정규직지회라는 글자를 마바에서 뽑아서 붙였다. 그만큼 조금씩 친해진 거지. 노동조합의 여파가 있었던 게 2차 업체들도 영향을 받고 없던 혜택들이 조금씩 생겼다.

해고와 민주노총전북본부

노동조합이 2005년에 출범했다. 사무실은 처음에 어디 있었나?
전주공장위원회가 2층으로 이사 가면서 1층에 풍물을 하는 데가 있었다. 장비들 보관 장소였는데 그것을 치우고 거기에 장소를 하나 만들어 준거지. 그거 갖고 회사하고 많이 싸웠다. 위원회가 우리 준거 때문에.

지금도 비정규직지회는 공장 출입할 때 자유롭지 않다. 2011년에는 해고당했었다.
노동조합 만들어서 파업했다는 것 때문에 그런 거다. 불법 점거 파업 했다고. 본보기로 각 업체별로 1명 내지 2명을 해고시켰다. 14명이 해고당했다. 우리 업체에서는 나하고 ㅈ, 두 명이 해고됐다.

현대자동차 전주공장 트럭2공장에서 파업중인 비정규직지회 조합원들(2010년 12월 2일) [출처:참소리]

해고 이후 어떻게 지냈나?
조합원들이 생계비를 모아줬기 때문에 의무로 무조건 출근했다. 공장 출입할 때부터 싸움이 시작됐다. 아침에 일단 경비가 막고 한 번 붙은 다음에 이제 노동조합(전주공장위원회)에서 와서 태우고 들어가든가 아니면은 우리가 한번 들어가서 안 나오고 거기서 숙박 해결을 하든가 그랬다. 모여서 회의하고 금속노조랑 프로그램 짜서 오면 양재동 집회를 가거나 연대 투쟁을 했다. 양재동 가서 얻어 터지기도 하고 그랬지.
그리고 민주노총전북본부에서 비상근 노안국장을 제안 받아서 맡았다. 민주노총 가면 재밌었다. 집회 가면 재밌고 사람 만나는 게 좋았지. 버스 파업하면서 내가 거기 집회는 매일 안 빠지고 갔다. 윤종광 동지가 수석(부본부장)으로 계셨으니까 거의 하루도 안 빠지고 행진하면서 참여했다. 그런 게 재밌었지. 종광이 형이 많이 힘들다 싶으면 같이 돌아다니기도 하고.

해고 기간은 얼마나 되었나?
3년 4개월이었다. 불파(불법파견)를 끝내고 정규직 전환하는 과정에서 해고자 복직하고 근속 인정하고 하는 수준에서 정리한 거다. (불법파견 문제가) 최병승 동지 철탑 농성 있고 나서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다. 나는 2015년 1월 5일자로 정규직으로 전환됐다. 전주공장에서는 정규직 전환된 사람 중에 내가 첫 번째로 대의원이 됐다. 경선했는데 과반에서 한 표인가 두 표인가가 부족했다. 재투표에서 내가 높았다. ㄷ형 영향이 컸다. ㄷ형이 많이 도와줘서.

현장운동, 지역운동의 과제

현장 조직 활동은 언제 시작했나?
내가 해고되기 좀 전일 때 윤종광 동지가 (전주공장위원회) 집행한 이후에 학습 모임을 만들었다. 종광이 형이 비정규직 동지들도 같이 하자는 의견이 있어서 같이 하게 됐다. 학습 모임 하다가 조직을 띄운 건데 명칭을 뭐로 할까 하다가 <차별 없는 노동자 투쟁위원회> 이렇게 된 거다. 지금은 차노투가 나눠졌다.

지금은 현장조직들이 어떤 상황인가?
현장 조직들이 매끄럽게 돌아가지 않는다. 신용, 의리가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게 없어졌다. 조직들 간에 발맞추기로 합의한 것도 잘 지켜지지 않는다. 조합원들이 성과급에 매몰되고 활동을 안 하기도 하고.
비지회(비정규직지회) 출신들은 아무리 안 했다고 그래도 파업 투쟁도 해보고 점거 농성도 해보고 한 사람들인데 지금은 비정규직 비조합원 출신들이 (현장조직에서) 활동 많이 한다. 교육을 잘 해서 활동가를 만들어야 하는데 노동조합의 중요성을 조금 못 느낀 상태에서 활동을 시작하다 보면… 회사에서는 대우를 해주니까. 내가 대의원 그만둔 지 3년 차인데도 지금도 회사는 대의원 님 대의원 님 그런다.

어떤 방향으로 가야할까?
집행할 수 있는 현장 조직이 몇 개 안 된다. 나머지는 소수다. 너무 소수다 보니 성향이 완전히 다른 조직들도 서로 합치려고들 한다. 내 입장에서는 옛날에 합쳐서 하기도 했던 곳은 같이 할 수 있으면 나도 마음 좋고 편하기도 하고. 옛날에 그래도 내가 친했던 사람들이 그 사람들인데. 트럭에 이남수, 장정현, 주인구, 박두영 있으면 든든했는데.

전북노동연대에는 무엇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나?
예전에 우리가 지역본부를 안 잡고 있을 때 조직에서 지역본부보다 더 열심히 활동했었다. 이번에 집행을 안 했지만 옛날처럼 뭉칠 수 있는 분들이 있으니까 조금씩 회복하면 된다.

마지막으로 오랜만에 복귀하고 난 심경을 들려달라.
내가 힘드니까 사람이 그립더라고. 그래서 온다고 하는 사람들은 너무 고맙지. 내가 뭐 아무것도 가져오지 말라고 했다. 제발 와서 얼굴만 비춰달라고. 현장 들어오니까 몸은 고달프지만 사람 만나는 게 좋아서 기분 좋다. 옛날처럼 인상 찌푸리지 않고 웃고 산다. 내년 정도는 괜찮아지겠지 해서 그때는 좀 돌아다니려고 한다.

Post Author: 전북노동연대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