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인권보장 체제를 마주하는 인권운동의 과제

지역인권보장 체제를 마주하는 인권운동의 과제

채민 (전북평화와인권연대 상임활동가)

인권제도화의 과정이 동시적으로 추진되지 않기에 각각의 인권운동 주체들이 마주하는 상황과 발 딛고 있는 구체적 조건들은 다를 수밖에 없다. 또한 지역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인권운동의 주체들과 개별적 영역·의제를 중심에 두고 활동하는 주체들 사이에서 인권제도화를 체감하는 온도의 차이도 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의 삶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행정과 제도 내에 인권이 자리하게 된 것은 과거 인권운동이 마주했던 현실과 상이한 부분이다. 또한 2010년대를 경유하며 영역·의제·지역을 넘어 차별과 혐오를 선동하는 조직과 세력이 인권제도화 자체를 표적으로 공격하고 있다. 이런 과정에서 행정과 정치권이 이를 수용하거나 방관하는 상황으로 이어지기도 하며 인권의 기본적 원칙 자체가 흔들리는 상황도 발생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인권제도화와 지역인권보장 체제를 마주하는 인권운동의 역할의 필요성과 방향을 점검하고자 한다.

인권제도화의 흐름

“‘무미건조한’ 보편의 언어로서의 인권은 ‘텅 빈 그릇’ 같아서, 누가 갖다 써도 되고, 누가 무엇을 그 안에 담아도 되는 것처럼 섬세하지 못하다.” 그렇기에 인권은 경계의 언어다. 법 앞의 평등이라고 하지만 사회구조 내에서 발생하는 차별과 불평등으로 인해 존엄이 특권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도 발생하고 있다. 따라서 인권은 보편적 권리의 보장을 외쳐온 소수자의 목소리, 당파성을 통해 확장되었다. 헌법에 규정되어 있는 인권은 구체적인 법과 제도의 조문으로 쓰고 있지 않다고 해도 현실을 규율하기도 한다. 또한 인권이 법과 제도가 되었다 해도 바로 현실에서 힘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차별과 불평등에 맞서는 시민들의 행동으로 인권은 현실이 되기도 하고 실효성 없는 정치의 미사여구로 그치기도 한다.

특히 대도시가 아닌 지역사회에서 인권제도화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가 중요할 수 밖에 없다. 지역사회는 인구의 유출 규모는 큰 반면 인구유입이 적으며 오랜 역사와 경험에 기초한 전통, 문화, 관습으로 새로운 인권 영역의 확장과 인권 보호체계를 발전시키려는 것을 방해할 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 공동체의 이름으로 인권 침해를 정당화하기도 한다. 또한, 지역공동체는 다양한 각각의 주체보다 집단을 우선시하는 공동체적 특성이 있다. 이로 인해 지역공동체는 구성원들의 자유와 평등보다는 공공의 질서에 따른 책임과 의무를 강조하게 되어 인권의 가치와 갈등관계를 형성하기도 한다. 그리고 불평등한 사회적 관계에 기초한 지역공동체의 관행은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는 인권의 개념과 충돌하게 되어 인권침해의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이러한 맥락 속에 지난 기간 국가단위를 비롯한 지역단위에서 인권제도화는 점차 확대되고 있다. 2001년 국가인권위원회 설립 이후 인권의 제도화는 법률의 영역보다 지방자치단체 차원의 인권보장 체계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2007년 경남 진주의 조례제정운동을 시작으로 지방자치단체 차원의 인권제도화(인권의 지역화) 과정이 추진되어 왔다. 또한 2012년 4월 국가인권위가 ‘인권기본조례 표준안’을 제시하고 광역·기초 지방자치단체에 조례 제정을 권고하며 인권제도화의 전국적 확산의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흐름 속에 전북지역 역시 2010년 7월 「전라북도 도민 인권보호 및 증진에 관한 조례(이하 전북인권조례)」가 제정되었으며, 최근까지 8개 기초 지방자치단체에서 인권보장 조례가 제정되었다. 또한 2013년 「전라북도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되어 10년을 경과하게 되었다. 이렇듯 조건과 상황에 따라 편차가 있었지만 각 지역별 인권제도화는 확대되는 추세에 있다. 또한 인권제도화와 다른 범주지만 협력적 관계를 형성하는 성희롱·성폭력·가정폭력·성매매 등 4대 여성문제 지원 기관과 단체를 비롯해 장애인·어린이·청소년·노인·이주민·(비정규직)노동자 등 다양한 권리를 지원하는 기관들도 확대됐다. 그러나 인권시민사회의 입장에서 제도화의 확대만큼 지역사회 안에서 내실 있게 인권제도가 구성되고, 인권을 증진시켰는지에 대해 인권시민사회는 비판적인 질문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인권제도화를 돌아보게 되는 전북지역 사례들

전라북도의 경우 전북인권조례에 따라 설립된 인권위원회에 혐오와 차별을 선동하는 인물이 지자체 인권위원으로 위촉되는 일이 과거 발생했다. 전북기독교총연합회(전북기총)은 퀴어문화축제 반대를 비롯해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 반대 활동을 하고 있는 문제를 일으키며 인권보장과 대척점에 서있었다. 2019년 제2회 전주퀴어문화축제 기간에도 전북기총은 “전북 생명, 가정, 효사랑 축제”라는 이름으로 퀴어문화축제를 반대하며 조직적인 혐오선동을 진행했다. 이러한 전북기총의 임원이 2017년 제2기 전라북도인권위원으로 위촉되었다. 게다가 전북기총 소속인 점만이 문제가 아니라 적극적인 혐오선동 주체로서 역할을 해왔던 것으로 파악되었다. 해당위원은 2015년 6월의 한 행사에서 “국민 건강과 정서를 깨트리고 시민들을 동성애에 노출시키는 퀴어축제에 절대 반대한다”는 성명을 낭독하는 전력도 있었다. 지역의 인권시민사회단체는 뒤늦게나마 상황을 파악하고, 제2기 전라북도인권위회 임기가 끝나는 2019년 8월 경 해당 인권위원 재위촉 중단과 제대로 된 인권위원 위촉 등의 기자회견과 대응을 진행했고 해당 위원이 재위촉 되지는 않았다. 또한 완주군 인권위원회에 2023년에 과거 성폭력사건으로 문제제기를 받은 인사가 위촉되었다가 언론의 취재와 보도로 이슈가 되면서 해당 인물이 자진 사임하는 경우도 있었다.

한편 2019년 4월에는 익산 시장의 다문화 가족 차별·혐오 발언 사건도 발생했다. 지역 다문화 주민행사에서 익산 시장이 공개적으로 다문화 주민에 대한 차별·혐오 발언을 한 사건이 뒤늦게 6월경에 알려지며 이주민사회와 지역시민사회의 규탄의 목소리가 제기되었다. 이 사안은 지역을 넘어 전국적으로 이주민·다문화 단위들의 강력한 비판과 문제제기로 이어졌다. 책임을 회피하던 익산시장이 사과하긴 했지만 익산시청에 국한되지 않고 정치권과 정부를 향해서도 이주민·다문화 주체들에 대한 차별을 시정하라는 적극적인 움직임도 촉발했다. 이 사례를 통해 익산시가 2016년에 인권조례를 제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지자체의 장에 의해 문제가 발생했다는 점, 조례에 시 소속 공무원을 포함한 모든 직원에게 연1회 이상 인권교육을 실시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조례제정 이후 인권교육은 1회에 그친 점 등이 알려졌다.

인권제도와 행정의 책임을 맡을 인사와 관련한 문제만이 아니라 행정이 인권제도에도 불구하고 인권침해와 차별적인 문제를 발생시키거나 미흡한 수준으로 인권제도를 운영하는 일들도 있다. 일례로 코로나19 시기 「전라북도 긴급재난지원금 지원 조례」에서 영주권자·결혼이민자를 제외한 이주민들은 배제되는 차별 사안이 발생했다. 시민사회의 차별 진정에 국가인권위원회는 2022년 10월 전라북도에 ‘영주권자 또는 결혼이민자에 해당하지 않는 외국인 주민에게 긴급재난지원금을 지급하지 않은 것은 차별행위’에 해당하며 개선을 권고했다. 그러나 전북도는 조례를 개정하겠다는 입장을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사례가 없다는 이유로 개정 절차에 나서지 않고 있다. 또한 전주시의 경우는 <제2차 인권보장 및 증진 기본계획>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미약하게나마 성소수자 인권 분야에 대한 사전 조사 등이 진행되었으나 기본계획에서는 최종적으로 누락되는 경우도 있었다. 2023년에는 교사 인권/노동권 이슈 속에서 전북교육청이 전북교육인권조례의 졸속 제정과 함께 전북학생인권조례를 축소시키는 결과로 이어지기도 했다.

전북지역을 넘어 전국적으로 인권제도를 흔드는 상황들 역시 간과할 수 없다. 혐오·차별을 조장하는 세력의 공격 속에 각 지자체의 인권제도 자체가 끊임없이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충남인권조례 폐지, 대구시인권위원회의 폐지, 각 지역 학생인권조례의 폐지시도와 후퇴 등은 이러한 문제가 집약된 상징적인 사건 중에 하나로 볼 수 있다. 이 뿐만이 아니다. 지역 공공도서관에서 성평등 도서의 퇴출, 대전인권센터의 혐오세력 위탁 문제 등 지역 인권제도와 가치들이 후퇴되는 상황이 2010년대 후반부터 최근까지 연이어 발생하고 있다. 이러한 사례들은 전북 지역이라고 예외가 될 수 없는 상황이며, 결국 ‘인권 없는 인권제도화’로 형해화 될 수 있다는 심각한 우려를 가질 수밖에 없다. 이와 관련되어 인권제도화를 넘어 인권보장체제 구성과 견인의 역할을 맡아야 하는 인권시민사회 역시 조건과 상황으로 인해 역량을 만들지 못하는 점도 존재한다.

인권시민사회단체가 인권조례 제정 과정 및 안착화 등 인권제도화 과정에서 참여하지 않은 채 지역인권보장체제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고 이러한 사례가 비단 전북지역만의 일이라고 판단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권제도화가 인권시민사회와 인권주체들의 목소리를 담지 못하는 형식적 틀만 가져간다면 지역인권보장체제는커녕 앞으로도 인권의 이름으로 이러한 문제가 반복될 것이다. 더욱이 올해 시작된 전북특별자치도의 체제에서 환경과 생태, 주민과 소수자의 삶보다 개발주의 관점이 더욱 강화된다면 인권의 자리는 더욱 밀려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인권의 의무를 진 국가권력과 지방정부, 정치권 어느 곳도 혐오선동 세력에 대한 대응은커녕 그들의 목소리를 여론으로 수렴하는 자세까지 보이고 있는 점에서 그렇다. 인권제도화와 인권행정이 특정 부서만의 업무로만 맡아진다고 하면 이러한 경향은 더욱 심화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인권시민사회가 제도화 된 인권행정을 감시와 참여에 더해져야할 과제가 앞으로 더 많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인권제도화를 넘어 지역인권보장체제로 한 걸음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지역 인권제도의 필요와 중요성을 간과할 수는 없다. 이에 지역인권보장체제를 고민하는 인권운동에서는 “인권제도화를 인권운동의 하나의 시작점으로 삼아 추진해갈 ‘제도의 인권운동화’”가 필요함을 제기하고 있다. 그렇다면 인권제도화를 통해 어느 단계까지 인권의 목소리를 촉진할 수 있을 것인가. 우선적으로 시민들의 반차별과 평등에 대한 사회적 감각이 숙성되도록 풀무질의 역할을 인권제도가 할 수 있어야 한다. 나아가 주민의 삶에 직간접적 영향을 부여하는 행정 전반 또한 이를 실행할 수 있도록 한다. 이를 위해 지역적 차원에서도 추진해볼 수 있는 과제를 추상적이나마 정리하고자 한다.

먼저 인권제도화에 대한 시민사회 영역과의 협력과 연대의 구축하자는 제안이다. 지역차원에서 반차별운동을 기조로 하는 인권시민사회단체가 정기적인 연석회의나 연대를 구성해가는 방안이다. 이미 국가인권위원회 설치 과정에서부터 인권시민사회는 ‘올바른 국가인권기구 실현을 위한 민간단체 공동대책위원회’ 등의 활동을 통해 인권의 원칙이 실현되는 인권기구가 만들어지도록 노력해왔다. 인권제도화 상황과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토대를 만들고 이를 기반으로 공동의 대응 및 연대를 구축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특히 인권시민사회가 부재하거나 희소한 기초지방자치단체의 관할 지역에서 활동하는 시민사회 주체들과 만나고 설득과 소통을 통해 인권제도화 의제에 대해 긴밀하게 대응하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통해 지역인권보장체제로 나아갈 수 있는 디딤대를 만들어갈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아울러 민관협치의 영역도 필요하다. 인권·시민사회와 주민참여가 활발하게 할 수 있는 ‘인권분야 지역협의체’와 같은 장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 이미 전북평화와인권연대 역시 2017년부터 전북도가 주관하는 기관단체인권협의회에 참여하고 있지만 깊이 있는 인권보장체제의 논의로 나아가지는 못하고 있다는 고민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협의체가 실효성 있는 일상적인 논의를 하기 위해서 인권시민사회에서 위상과 목표를 구체적으로 설정할 필요가 있다. 가령 현재 윤석열 정부 들어서 심각해지고 있는 국가인권위원회의 위태로운 상황을 대응하며 지역인권사무소가 확대될 수 있도록 인권시민사회와 유관 기구인 지역인권위원회 등이 네트워크를 만들어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적지 않은 인권기구가 행정 주도로 진행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순조로울 수만은 없겠지만 지역인권기구가 인권시민사회와 유리되지 않도록 하는 시도는 계속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권보장체제를 함께 만들어갈 지역 인권시민사회의 역량강화도 필요하다. 이는 비단 인권운동단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권옹호를 위한 시민주체를 어떻게 형성할 수 있을지도 함께 고민해야 할 부분이다. 시민인권옹호자의 등장은 자연발생적일 수밖에 없으며 인권교육을 비롯해 인권영역의 다양한 실천적 활동 속에서 형성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를 위한 인권시민사회의 공동 기획을 만들어볼 수도 있을텐데 가령 시민(인권)활동가 강좌와 같은 형태로 앞으로 인권시민사회가 이러한 내용을 담보하면서 구체적인 사업과 과제를 함께 모색하고 발굴해낸다면, 인권시민사회와 인권제도화에 새로운 힘을 부여하는 사례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Post Author: 전북노동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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