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 갑오농민전쟁 130주년, 유적지 답사기
김연탁(전북노동연대 회원)
필자에게 갑오농민전쟁은 그냥 흘러간 역사가 아니다. 그 시작은 대학생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재수하며 자포자기로 입학한 학교에서 새로운 삶과 희망을 찾은 계기가 철학연구회‘프로메테우스’라는 동아리였다. 신학기에는 많은 학생들로 붐볐지만,‘벚꽃엔딩’이라는 말이 적절하게 벚꽃이 질 때는 정예만 남았다. 선배들은 학생회 활동을 병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주로 신입생들이 동아리를 차지했다. 또 다른 방문객은 흡연 공간을 찾는 여선배들이었다. 그 시절만 하더라도 여성들의 흡연이 자유롭지 못했기에, 신입생들만 있는 만만한 우리 동아리에서 담배들을 피워댔다. 그 선배들을 통해 ‘프로메테우스의 전신이 동학사상연구회(약칭, 동사련)였고, 동아리 선배가 학생운동과정에서 구속되면서, 급하게 동아리 이름을 개명하게 되었다.’고 들었다. 그래서, 동아리에는 동학 관련 서적과 자료가 많았다. 특히, 동아리 한쪽 벽을 가득 채웠던 그림과 판화는 지금도 생각이 날 정도로 걸작이었다. 문제의 그 선배가 출소하고 동아리에서 함께 활동하게 되었다. 선배는 농민운동에 전망을 두고 있어서인지, 갑오농민전쟁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1학기가 끝나자마자 입대하였다. 그리고, 갑백사 100주년을 맞이하여 전주에서 정읍까지 도보로 다녀왔다는 무용담을 군 휴가중에 여러 사람에게 듣게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갑오농민전쟁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5월 15일, 전북교육연구소에서 주최하는 『동학농민혁명 130주년기념 유적지 기행』에 참여했다. 실수로 휴대폰에서 카카오톡 앱을 지워버려, 모집기간을 경과하여 연락해서 겨우 참여할 수 있었다. 수차례 답사경험이 있었지만, 오랜만에 참여하여서 전날 관련 서적을 찾아보느라 세시가 넘어서야 잠들었고, 늦잠 잘까 염려되어 수시로 깨어 시간을 확인하느라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해 피곤했다. 원래는 전주종합경기장까지 걸어서 갈 계획이었으나, 준비가 약간 늦어져 버스를 탔다. 보통 소요시간보다 10분이 더 걸렸지만, 여유있게 도착할 수 있었다. 참석자들은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안면이 있는 분들이었다.
갑오농민전쟁은 한국의 근현대사에서 철저하게 봉인되어 있었다. 이러한 역사를 소환한 사람은 박정희였다. 1961년 5·16 군사쿠데타를 정당화하기 위해‘전봉준’이란 한 인물만을 부각시키려 했으나,‘전봉준’은 외세와 봉건제에 핍박받다가‘보국안민’,‘제폭구민’ 기치를 내걸고 봉기하여 죽어간 모든 이였기에 그 역사가 수면 위로 드러냈다. 그래서, 정권의 성격에 따라 명칭 또한 바뀌었다.‘동학난’,‘동학운동’, ‘동학혁명’, ‘갑오농민전쟁’,‘갑오동학혁명’등이다. 이는 4·3 제주민중항쟁이나 5·18 광주민중항쟁도 비슷한 곡절을 겪었다.
농민군이 패퇴한 이후, 살벌한 공안통치 속에서 고향을 떠나 성까지 바꾸고 제사마저 숨어서 지내야 했던 후손들은 1969년 4월 동학혁명모의탑건립위원회를 구성하여 동학혁명모의탑을 세웠다. 사발통문을 작성한 집은 개인소유여서 그 안을 들어갈 수는 없었고, 대문 밖에서 안내판을 읽고 갑오농민전쟁을 시간의 순서대로 그린 그림을 전시한 담벼락을 천천히 구경하였다. 사발통문은 1968년 대청마루 밑에서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진품 여부가 의심된다고 한다. 필체가 일정하고 보관상태가 너무 좋다는 것이 이유였다. 별로 떨어지지 않는 곳에 마을회관이 홍보관으로 운영되고 있었고, 무명동학농민군 위령탑이 세워져 있었다. 위령탑에 참배를 하고, 현재 고부초등학교가 있는 고부관아터로 향했다.
당시, 정읍지역은 농민군 세력만큼 지배세력도 강했다. 당시 최익현, 임병찬 등 절개 있는 유림마저 농민군 세력을 탄압했다. 하지만, 1905년 을사조약 후 최익현과 임병찬은 의병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대마도에 끌려갔다. 최익현은 일제가 제공한 물과 음식을 거부하다가 아사하였고, 임병찬 역시 대마도에서 살아온 후 계속 반일항쟁을 진행하다가 거문도에 유배되어 생을 마치게 된다. 유림세력들이 10년만 더 일찍 세상의 판도를 깨우쳤더라면 어땠을까 싶다. 고부 관아터 위쪽 언덕배기에 향교가 있다. 향교에서 보면 관아가 다 보인다. 일제가 관아를 폐하면서도 향교는 그대로 두었다.
점심을 먹은 후 우리는 전봉준 장군 고택으로 향했다. 전봉준 장군은 몰락 양반으로 서당 훈장과 농사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갔다고 한다. 집은 방이 3칸이고 부엌이 있었다. 벌채로 창고가 있었다. 이 고택에 살았을 때, 조병갑의 만행에 대항하여 1천 여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고부 관아를 습격하여 갑오농민전쟁의 발화점이 되었다.
이어서 전봉준 장군 단소로 향했다. 서울에서 사형을 당한 후 전봉준 장군의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래서, 할 수 없이 1954년 천안전씨 문중에서는 제단과 비석을 만들어 넋을 모셨다. 그리고, 1994년과 2004년 허묘가 조성되고 부지가 확대되었다.
근처에 있는 전봉준장군 부모 묘소로 향했다. 전봉준 장군 부친인 전창혁은 동리에서 신망을 받는 사람이었다. 1893년 6월 조병갑의 탐학에 감세를 요청하다가 곤장을 맞고 장독으로 유명을 달리했다. 그의 죽음은 갑오농민전쟁의 도화선이 된다.
2004년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들의 명예회복 특별법이 제정되며 동학혁명국가기념일을 논의해왔는데, 전주는 동학군 전주성 입성일(음, 4월 27일), 고창은 무장기포일(음, 3월 20일), 부안은 백산봉기일(음, 3월 25일), 정읍은 황토현 전승일, 공주는 우금치 전투일(음, 11월 19일)을 주장했다고 한다. 많은 논의 끝에 2019년에야 1894년 4월 7일(양, 5월 11일) 황토현 전승일로 정했다고 한다. 맑았던 날씨는 흐려져 비를 뿌리고 있었고, 바람이 불어 추웠다. 정읍시 덕천면 황토현 전적지에 소재한 동학농민혁명기념관에 갔다. 말목장터의 상징물이었던 감나무가 2003년 태풍에 쓰러져 입구 바로 앞에서 우리를 맞이하고 있었다. 갑오농민전쟁의 역사가 순서대로 서술되어있었다. 전봉준 장군은 순창 피노리에서 김경천의 밀고에 의해 피체된 것으로 쓰여져 있었다. 그런데,‘김경천이 순창 사람이 아니라 정읍 사람이다’는 낙서가 있었다(아무래도 순창 사람의 억울한 한풀이인 것 같다). 그리고, 친일작가 김경승이 1987년 제작한 전봉준 장군의 동상은 철거되었고, 그 자리에는 많은 전봉준 장군을 필두로 농민, 사냥꾼, 여성, 아이, 촌로 등 백성을 상징하는 조형물로 대체되어 있었다. 이전의 전봉준 장군의 동상은 눈동자가 없고, 혼자 외롭게 서 있었다. 덩치가 작아 녹두장군이라는 별명으로 불릴 만큼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일본의 기자마저 그 죽음을 애도할 정도로 남다른 식견과 안목이 있던 전봉준 장군을 모독한 것같이 느껴졌는데, 새로운 조형물을 보니 위로받는 느낌이었다.
우리는 말목장터와 만석보, 취향정 방문을 끝으로 답사를 마쳤다. 말목장터는 새로운 감나무가 푸른 잎과 울창한 기골을 자랑하며 서 있었고, 만석보는 130년 전과 같이 두 물이 합쳐지는 장엄한 풍경은 여전했지만, 백성들의 한과 절규의 현장이 아닌 사진 명소가 되어있었다. 피향정은 호남제일정이라는 고명답게 위상을 뽐내고 있지만, 사실 볼 것은 다른 데 있었다. 담장 아래에는 많은 비석이 세워져 있었다. 그 중, 조병갑이 고부 백성의 고혈을 쥐어짜서 세운 아버지 조규순의 영세불망비와 백성들이 스스로 세운 소설 임꺽정을 쓴 홍명희 씨의 아버지 홍범식 군수 애민선정비가 같이 서 있다. 조규순의 비석은 머리 부분을 포함하여 많은 부분이 훼손된 반면, 홍범식군수 비석은 원형 그대로를 보존하고 있었다. 마치 비슷한 시기에 이 세상을 떠났으나, 많은 사람들의 애도를 받은 차베스와 대문 앞에 꽃 한 송이만 떨어져 있던 대처가 생각났다.
수 십년 동안 변하지 않는 세상을 보며 총선 이후 실의에 빠져있다. 130년 전 봉건제의 폭압과 외세의 위협 속에서 새로운 세상과 미래를 위해 죽음을 각오했던 농민군들의 발자취를 쫒으면서, 반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참여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해주신 윤성호 선생님과 해설을 해주신 이동백 선생님, 그리고 전북교육연구소 회원분들에게 심심한 감사를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