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순사건과 지리산, 그리고 빨치산
김연탁(아래로부터전북노동연대 전 사무처장)
여수 밤바다에서 지리산으로
2025년 10월 24일 공공운수노조 전북본부 역사기행에 참여하였다. 2025년 역사기행 주제는 2024년과 연결되어있다. 2024년에는 14연대의 봉기, 민중의 항쟁과 희생을 주제로 여수 지역을 답사했다면, 2025년 역사기행은 구례와 광양 백운산을 통해 지리산으로 후퇴한 14연대의 행적과 빨치산 투쟁을 주제로 진행하였다. 안내자는 대구에서 노동운동을 하다가 2000년대 중반 지리산으로 귀촌한 신강 동지가 수고해 주셨다.
날씨는 화창했지만, 지리산이 가진 무게감 때문인지 마냥 들뜨지는 않았다. 지리산은 역사적으로 외침과 권력의 학정에 못 이겨 민중들의 목숨 건 투쟁의 최후의 사선이 되어왔다. 특히, 일제 침략기와 한국현대사의 분수령이 된 해방정국에서 수많은 투사들이 그 품에서 저항하다가 끝내 영원히 잠들었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호연지기를 기른다는 핑계로 놀러 다니고, 매년 여름이면 남원 이모네 집에서 머물며 시원한 뱀사골 계곡에서 발 담그곤 했다. 하지만, 남부군·지리산·빨치산의 딸·태백산맥·녹슬은 해방구 등의 책과 ‘지리산, 너 지리산이여’의 노래를 접한 후의 지리산은 확연하게 달랐다. 이전에도 ‘지리산’을 배경으로 하여 역사기행과 답사를 수차례 기획하기도 하고, 참여하기도 했다. 하지만, 오랜만에 지리산의 품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1948년- 1953년의 지리산
예년과는 다르게 날씨가 화창했다. 전주를 출발해 구례로 향했다. 차로는 더 이상 갈 수 없어 영암마을 입구에서 내려 14연대 지휘대 비트를 향했다. 10분 정도 포장된 오르막길을 오르고, 사람이 지나다닌 흔적이 별로 없는 산길 15분을 더 오른 후에 비트를 볼 수 있었다. 비트보다 더 인상적인 사연은 황덕순 할머니가 경험한 비극이었다. 포장된 길과 산길의 경계에 황덕순 할머니 댁이 있었다.

황덕순 할머니의 시아버지는 장길수씨로 영암마을 이장이었고, 14연대 군인에게 길을 안내했다는 이유로 총살당했고, 마을은 소개되었다고 한다. 이웃 현천마을에서도 가옥 전소 후 23명이 총살당했다. 황덕순 할머니는 이 내용을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증언하였고, 2008년 조사보고서에 실렸다. 할머니는 평생 가슴에 묻어놓은 이야기를 증언하고, 2011년 3월 10일 별세하였다.
이후 버스를 돌리기 어려워 구례 간문초등학교를 걸어서 갔다. 간문국민학교는 14연대 봉기군과 박종화 유격대가 하사관 교육대 90명을 생포한 곳이다. 김지회 중위의 “역사에 죄를 짓지 말고 모두 해산하여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호통과 적임에도 교통비까지 챙겨주며 방면한 배포가 존경스럽다.

도보로 답사를 하는 바람에 예정보다 많이 늦어졌고, 시장했다. 그런데, 식당이 있는 마을이 홍순석, 김지회를 포함한 봉기군이 마을 주민의 밀고로 인해 적의 총격을 받고 사살된 곳이란다. 건강해지는 맛이라고 에둘러 표현했지만, 밥맛이 썩 좋지는 않았다. 식사를 하고, 뱀사골 산책로를 따라 빨치산 인쇄소로 이용된 지리산 뱀사골 석실로 갔다. 석실에는 누군가 기도를 한 듯 촛대가 있었고, 향과 초를 밝힌 흔적이 있었다. 이곳에서는 세 가지 종류의 소식지가 인쇄되어 배포되었다고 한다. 남부군에서 발행한 승리의 길, 전북도당에서 발행한 전북 빨치산, 남원군당에서 발행한 투보였다. 첩첩산중 속에서 북풍한설을 견디며 그 길을 토벌군을 피해 목숨을 걸고 오갔을 전사들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남한 해방을 위해 모든 희생을 불사한 당시 전사들의 열정에 경의를 표하면서도, 지금 현시기 세습정권이 지배하고 있는 북한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마지막 장소인 뱀사골 탐방안내소 2층 전시관에 갔다. 2층 전시관에는 빨치산 토벌대와 빨치산 관련 내용이 함께 전시되어 있었다. 예전보다 빨치산 관련 전시 내용이 많이 축소되었다고 한다. 차일혁 경무관과 최순희 작곡가, 이현상 선생의 한시가 눈에 띄었다. 차일혁 경무관은 흔치 않은 독립군 출신 경찰 간부로 6.25전쟁 시기 천년고찰 화엄사를 전소시키라는 상부의 명령에 기지를 발휘하여 문짝을 떼어 불태움으로써 화엄사 소개를 막았다고 한다. 화엄사에는 공적비가 세워졌다고 한다. 최순희 작곡가(1924-2015)는 북의 문화를 이끌 재목으로 북에 남으라는 간곡한 당부를 거절하고 남으로 내려와서 빨치산 투쟁을 하다 생포되었고, 동지들의 넋을 위로하는 위령제를 매년 지냈다고 한다. 그녀가 작곡한 「지리산 곡(哭)」을 들을 수 있었다. 이현상(1905-1053) 선생은 일제 말부터 노동운동으로 시작하여 남부군 사령관까지 역임한 혁명가다. 나는 수많은 빨치산 관련 서책과 경성트로이카에서 그를 접했다. 이현상 평전까지 구입해서 읽을 정도로 선생은 나에게 특별한 분이다. 그 많은 희생자들의 염원과 절절한 사연을 담기에는 전시관이 너무 옹색하다는 생각을 했으나, 경남 산청에 있는 지리산 빨치산 토벌 전시관에 비해서는 ‘그래도 낫지 않나?’라는 생각을 했다.
다시, 2025년으로
2025년 공공운수노조 전북본부 역사기행은 양면적이다. 역사기행 자체는 예년에 비해 아쉬웠다. 한마디로, 답사지의 풍경이 스토리(서사)를 못 받쳐 주었다고 할까? 하지만, 역사기행과 관련한 답사기를 쓰기 위해 다시금 곱씹고 내용을 보충하기 위해 자료를 찾는 과정에서 훨씬 더 큰 감흥을 느끼고 있다. 역사기행에 참여하는 사람의 마음은 제각각 다를 것이고, 다른 사업보다는 기대치가 높기 때문에 참가자의 마음을 모두 만족시키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번에는 화창한 날씨, 그리고 지리산의 풍경, 그리고 세심하게 준비한 공공운수노조 집행부의 따뜻한 마음이 조금 부족한 부분을 채웠다. 역사기행을 기획하고 준비하고 실행하기까지 들이는 공력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경험해 본 사람으로서, 그럼에도 공공운수노조 전북본부 역사기행은 계속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며 응원한다. 공공운수노조 전북본부 집행부에게 심심한 감사를 드린다.

별첨
1. 14연대의 철수와 이후 행적, 지도부의 최후
미군정은 국방경비대를 창설하기 위해 전라남도에 속해있던 제주도를 도로 승격시키면서, 각도마다 1개연대씩 1-9연대를 창설하고, 해방과 동시에 국군을 신설하기 위해 각도마다 추가로 연대를 더 창설하기로 한다. 14연대는 4연대에서 1개 대대를 차출해서 지역에서 인원을 보충하여 만들게 된다. 14연대 봉기의 주축인 김지회 중위와 홍순석 중위는 4연대에서 차출된 간부였다. 당시는 징병제가 아닌 모병제였으므로, 봉기 당시 인원을 완벽하게 채우지 못하고 2,000명 내외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여순사건 직후 철수 과정에서 진압군과의 교전과 이탈로 입산자 숫자는 800여명으로 추정된다. 교전에 의한 사망자보다는 이탈자가 대다수였으며, 이탈자들은 추후 군사재판에 의해 총살형에 처해지게 된다. 김지회가 이끄는 봉기군 주력부대는 문수골 초입에 있는 문수국민학교에 최초의 사령부를 설치하고, 영암마을 뒤 대밭굴에 지휘부 비빌 아지트를 설치했다. 그리고, 지리산 주변마을을 보급지로 삼아 보급투쟁을 전개했다. 지리산 일대의 주민들은 밤에는 봉기군에 시달리고, 낮에는 군경에 시달리는 이중고를 당하게 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무고한 민간인이 학살당했다. 진압군이 여수를 탈환한 10월 27일, 구례 역시 3연대(전주 주둔)에 의해 탈환되었고, 진압작전은 토벌작전으로 바뀌었다.
11월 12일, 간문국민학교에 주둔하고 있던 12연대 하사관 교육대를 14연대 봉기군과 구례군 박종하 유격대가 급습하여 90명의 교육생을 생포하였다. 김지회 중위는 생포된 교육생을 ‘집으로 돌아가라’는 훈시와 함께 교통비(400원)을 지급하며 11월 17일 풀어주었다. 11월 14일에는 12연대 백인기 연대장이 공비토벌작전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남원 사령부로 가던 중 봉기군의 습격을 받고, 산동면 사랑마을 대숲에 숨었다가 죽게 된다. 이 사건으로 대규모 토벌작전이 전개되어 봉기군은 지리산으로 퇴각하게 되었다. 여순사건으로 구례지역의 사망자는 3,000명 이상으로 추산되는데, 이 중 산동면에서만 1,000여 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14연대 봉기군은 1949년 3·1절 기념투쟁의 일환으로 지리산 일주순회투쟁을 전개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4월 9일에는 덕유산 지원투쟁에서 돌아오던 중 남원시 산내면 반선리에서 묵게 된다. 주민의 신고로 봉기군 지휘부 홍순석 등 17명이 사살되고 7명이 생포된다. 4월 13일에는 진압군을 피해 도망쳤던 김지회의 처 조경순이 체포되었고, 김지회는 돌들골 반석에서 사살된 채로 발견되었다. 이로써 14연대 봉기군은 해산되었다. 남부군이 해체된 이후, 전사할 때까지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이 썼던 부대 이름이 ‘김지회 부대’였다. 그만큼 이현상도 김지회를 아꼈다고 한다.
2. 뒷 이야기, 여성 빨치산 조경순
여성 빨치산은 흔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래서, 빨치산 내에서도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조경순이 입산을 하게 된 경위는 김지회와의 이별 대신 여성 빨치산을 선택한 스스로의 의지다. 김지회는 1948년 6월, 급성맹장염 수술을 받게 되고, 광주도립병원 간호사 조경순을 만나게 된다. 1930년생인 조경순은 부모를 따라 6살 때 오사카로 이주했다가 해방 이후 고향인 제주로 돌아왔다고 한다. 1946년 광주의과대학 간호부학교에 입학하여 1948년 2월에 졸업한 후 광주도립병원에 근무하게 된다. 김지회와 조경순은 결혼 승낙을 받기 위해 제주도를 방문했지만, 조경순 아버지(목사)는 기독교도가 아니면 승낙할 수 없다고 한사코 반대했다. 그러나, 조경순은 병원을 그만두고 1948년 8월부터 동거하게 되고, 신혼을 즐길 새도 없이 10·19 봉기가 발생하게 되었다. 조경순은 함께 입산을 선택하였다. 체포 후 1949년 9월 29일 지리산 문화 공작대 사건 고등군법회 재판이 있었고, 조경순은 유진오·홍순학·유호진·김태준·이용환·박우용·이원장과 함께 총살형을 선고받았으나, 조경순만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후 서울 마포형무소에 수감 된 후, 삶을 마친 것으로 자료에는 기재되어있다. 하지만, 제주도에 살고 있는 조카의 증언에 의하면 6·25전쟁 시기 인민군에 의해 형무소 문이 열리며 북으로 갔다고 한다. 일본에 있는 친지를 통해 연락이 왔었다고 한다.
또 한명의 여성 빨치산으로 신애덕이 있다. 배우 문근영의 외할머니로 유명한데, 전북빨치산 남원군당 소속의 전직 간호사였다고 한다. 환자비트인 남원 귀정사에서 있었다고 한다. 민주노총전북본부 윤종광 전본부장이 잠들어계신 곳이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