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지금 ‘전국민 고용보험’과 ‘사회안전망’ 확대가?
-‘사회안전망’은 ‘사회보장’과 같은 말이 아니다
코로나19 이후의 위기 상황에서 ‘사회안전망 확대’, ‘전국민 고용보험제 도입’이 노동운동 진영의 주요 요구로 제기되고 있다. ‘사회안전망(social safety net)’은 종종 ‘사회보장(social security)’과 혼용되어 사용되지만 용어의 기원과 사회적 의미를 따져보면 그 둘은 서로 극과 극에 놓여 있는 개념이다. 한국 사회에서 금융위기를 겪으며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때 사회안전망 개념이 도입되었음을 상기하면 민주노총이 ‘사회보장’ 대신 ‘사회안전망’ 확대를 전면에 내건 것은 신중치 못한 단어 선택이다. 그런데 당면한 경제위기의 첫 번째 대안으로 ‘전국민 고용보험제’를 들고 있는 상황을 보면 ‘사회안전망’이 ‘사회보장’의 단순 오기(誤記)로 보이지만도 않는다. 이 글에서는 한국에서 사회안전망과 고용보험제도 도입의 역사를 짚어보며 현재 상황과 비교해보고자 한다.
사회보장과 사회안전망
먼저 사회보장과 사회안전망은 역사적 출발점이 판이하게 다르다. 사회보장이 제도로서 처음 등장한 것은 러시아 혁명 이듬해인 1918년이다. 그 해 러시아 노동인민위원회는 “완전한 사회 보험 도입 선언(“the Declaration of the introduction of complete social insurance)”과 “노동자의 사회 보장에 대한 규정(the Regulation of the social security of the working people)”을 채택하고 이 규정에 따라 사회보험을 사회보장으로 대체하였다.(Goudima&Rybalko, 1996) 그 이후 미국에서도 사회보장법(Social Security Act, 1935)이 제정되었다. 뉴딜정책과 더불어 자본주의 사회에 정착된 사회보장은 소득재분배와 이를 통한 모든 시민·노동자의 최저 생계 보장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반면 ‘사회안전망’은 브레튼우즈 협정에 참여했던 국제금융기구들(IMF, IBRD 등)에 의해 고안된 개념이다. 1980년대 중남미 외채위기가 발생하자 IMF, IBRD, 세계은행은 이들 국가에 차관을 제공하는 대신 구조조정을 강제했고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실업, 비정규직, 빈곤층의 증가, 양극화 심화와 같은 충격을 흡수하기 위해 일시적이고 단기적인 조치로서 ‘사회안전망’ 도입을 요구한다. 1987년 볼리비아에서 세계은행의 지원으로 임시 고용 창출을 통한 긴급 구제를 목적으로 하는 비상사회기금(Emergency Social Fund)을 처음 설치하였고, 이후 동구권 위기, 동아시아 위기 등 매 위기마다 구제금융, 구조조정(안정화 프로그램), ‘사회안전망’이 패키지로 투입되었다(Litvack, Jennie I., 2011).
이렇듯 국제금융기구가 요구한 사회안전망은 일시적이고 잔여적인 성격의 것(이준영 등, 2015)으로 사회보장과는 기원, 성격, 내용 등에서 차이가 있다. 한국사회에서 ‘사회안전망(Social Safety Nets)’이란 용어가 사회보장을 대체하여 통용된 것도 바로 97년 위기를 경과하면서 부터다. 한국에는 지금도 ‘사회보장기본법’이 살아있고 사회보장이 법적 용어이지만, 지난 20년 간 정부, 전문가, 언론은 법적용어 대신 IMF가 주입한 사회안전망이란 용어를 성공적으로 통용시켜냈다. ‘보장’과 ‘안전망’ 사이의 간극은 딱 단어가 갖는 의미만큼의 거리, 떨어지지 않게 받치느냐 떨어지는 사람을 망으로 거르느냐 사이의 거리일 터다.
한국에서 고용보험제도 도입과 사회안전망
한국에서 고용보험이 본격적으로 논의됐던 시기는 한국 최초의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이었던 경제안정화종합시책이 추진된 1970년대 말~1980년대 초였다. 당시에는 정부 내 실업보험제도의 부작용에 대한 우려와 기업에 주는 부담, 산업구조의 미성숙 등의 이유로 실업보험제도의 도입은 일단 유보된다.(류만희, 2005) 그러다 김영삼 정부 들어 1991년 제7차 경제사회발전 5개년계획에 고용보험제도가 포함되었고 1993년 12월 입법을 거쳐 1995년 7월부터 전격 시행된다. 1990년대 초반 한국의 실업률이 2%의 낮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음에도 고용보험제도를 도입한 것은 “국가의 인력정책 추진을 위한 핵심수단으로서 고용보험제도의 위상을 설정한 데 기인”(한국노동연구원, 1997)한다. 박정희-전두환 정권이 고용보험제도를 처음 검토했을 때도, 김영삼 정권이 본격적으로 고용보험제도 도입을 준비할 때도, 두 시기 모두 정권 차원에서 신자유주의 정책개혁과 노동 불안정화를 예비한 셈이다.
고용보험 제도 확대에 속도를 붙인 것은 1997년 금융위기였다. IMF는 라틴아메리카, 동구권 국가들에 그랬던 것처럼 한국에도 신자유주의 구조개혁과 ‘사회안전망’ 도입을 패키지로 요구했고 고용보험 제도의 확대는 그 일환이었다. 1997년 12월 3일, IMF와 한국정부 사이에 체결한 대기성 차관 제공에 관한 양해각서에는 “고용보험제도의 기능을 강화해 인력 재배치를 촉진하고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제고”한다는 문구가 포함되었다. 1998년 2월 6일 체결된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노사정 사회협약」에도 한시적 실업급여 수급 자격 완화, 실업급여 최저지급기간 연장, 고용보험 적용사업장 확대, 저소득 실직자 생계 지원, 사회복지 예산 확대 등의 내용이 담겼다.1덧붙이면 이 협약에는 보유과세 강화, 양도세 완화, 5인 미만 사업장 근로기준법 적용, 부당노동행위 근절, 공무원·교원 단결권 보장, 실업자 초기업단위노조 가입자격 인정 등 폭넓은 노동·사회 의제가 포함되었고, 동시에 ‘노동시장의 유연성 제고’를 위한 정리해고제도, 파견제도를 허용하기로 했다. IMF 양해각서와 2.6 노사정 합의를 토대로 고용보험 적용 대상이 대폭 확대(1998)되고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가 시행(1999)되었다.
김대중 정부를 선도적 복지 정부였다는 여기는 일각의 평가와 달리, 김대중 정부의 복지정책은 IMF에 의해 강제된 ‘복지’였고 김대중 정부 스스로 명명했듯 ‘생산적 복지’, 즉 자신의 노동(개선)능력을 증명하지 않으면 사회보장에서 제외시키는 선별적 복지였음은 정권 내내 대두된 비판이었다.
‘전국민 고용보험제’가 제기되기까지
애초 ‘안전망’ 개념으로 도입된 고용보험 제도이지만 고용보험의 확대가 노동 불안정화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면서 사각지대는 넓어지고 ‘안전망’의 틈새도 성글어졌다. 97년 위기 이후 고용보험 제도 개선 논의가 대두된 것은 2008년 금융위기를 거치면서였다. 특히 ‘전국민 고용보험제’는 2009년,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이하 새사연)에 의해 처음 제기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새사연은 고용보험 사각지대 인원이 1,050만 명에 달함을 지적하고 정부의 일반회계 출연을 통해 ‘전국민 고용보험제’를 시행해야한다고 제안했다(이상동, 2009).
그리고 코로나19 확산 이후 경제위기가 전면화 된 올해, 다시 ‘전국민 고용보험제’가 주요 의제로 부상했다. 올해 ‘전국민 고용보험제’에 불을 지핀 것은 새사연과 정책적 친화성이 있는 민중당이었다. 민중당은 ‘전국민 고용보험제’ 시행을 21대 총선 공약으로 내세웠다.
민주노총은 공을 넘겨받아 ‘사회안전망 확대’와 ‘전국민 고용보험제’를 각계로 확산시킨다. 애초 민주노총의 고용보험 관련 요구는 고용보험 사각지대 해소, 특수고용 노동자 고용보험 적용 등의 표현이었다. 그러다 4월 6일에 진행된 민중당과의 공동선언에서 ‘전국민 고용보험제’를 처음 언급했고, 4월 17일에는 정부를 향해 코로나19 원포인트 노사정 비상협의를 제안하며 그 의제 중 하나로 ‘전국민 고용보험제’를 포함한다.2민주노총이 ‘전국민 고용보험제’를 총노동의 요구로 내건 것은 너무 급작스러웠다. 내용에 대해 충분한 검토를 거쳤으리라 여겨지지 않는다.
이에 답하듯 5월 1일, 청와대 강기정 수석이 “전국민 고용보험이 갖춰지는 게 포스트 코로나의 과제”라고 말했고, 같은 날 민주당 이인영 원내대표가, 다음 날에는 김용범 기획재정부 1차관이 고용보험 제도 개편을 언급했다. 그리고 5월 10일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3주년 연설에서 “전국민 고용보험 시대 기초를 놓겠다”고 밝혔다. 코로나19가 사회를 뒤흔들었다고는 하나 너무 빠른 전개다. 문재인 대통령 발언의 취지는 전국민 고용보험을 당장 실현하지 않겠다는 의미라는 비판도 있으나 오히려 주목할 것은 경제위기 국면에서 ‘사회안전망’ 강화의 반대급부가 무엇이었는지에 있다.
문재인 정부는 2020 하반기 경제정책방햑으로 ‘디지털 뉴딜’을 언급했고 사용자 단체와 보수 이데올로그들은 코로나19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며 비대면 경제를 주창한다. 이는 코로나19를 핑계 삼아 비대면 노동, 비정형 계약과 같은 불안정 노동을 더욱 적극적으로 확대하겠다는 시도인데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1998년 합의에서와 같이 사회안전망, 고용보험 제도 확대가 수반될 필요가 있다.
결
한국보다 실업급여 제도의 지원 범위가 넓은 미국은 그만큼 해고가 자유롭다. 코로나19 이후 미국 실업률이 역대 최고치를 갱신하고 있는 상황은 역설적이지만 미국의 실업급여 제도 덕분이다. 2020년 경제위기 앞에서 민주노총의 구호가 ‘사회안전망 확대’, ‘전국민 고용보험제’로 요약되고 여기에 집권세력이 공명하는 구도는 1998년 노사정합의의 쓴 경험을 상기시킨다. 정리해고제, 파견제를 내주고 ‘사회안전망’을 얻었던 노사정 합의는 그 이후 불안정 노동이 양산되고 계층, 계급 간 격차가 확대되는 데 일조했다.
게다가 1997년 이후 정부, 자본의 고용안전성 개념은 적절한 일자리 매칭으로 실업기간을 단축시킬 수 있다는 추상에 근거하고 있다. 청년 실업문제의 핵심이 일자리 미스매칭에 있다던 기재부 차관의 발언(2018.03.)이 그런 시각을 대표한다. 그래서 AI매칭이니, 일자리 매칭과 연계한 실업부조니 하는 것들이 핵심적인 고용 대책으로 논의되는 실정이다. 여기에서 고용안전망은 그 일자리 매칭 기간의 생계를 보험이나 정부 재정으로 일부 담보하고, 일자리 매칭을 정부가(실제로는 민간위탁한 민간업체들이) 지원한다는 개념이다.
이런데도 경제위기 국면에서 총노동의 최우선 요구가 안전망 확대여서는 곤란하다. 해고를 금지하고, 노동 불안정성을 낮추고, 영세사업장 노동자의 교섭력을 확대하는 방안을 다루는 것이 먼저여야 한다.
[보충] 전국민 고용보험제는 성공할 수 있을까?
전국민 고용보험제가 주 가입확대 목표로 삼는 특수고용, 플랫폼 노동자들은 대단히 불안정한 고용과 실직을 반복한다. 이들이 고용보험 적용에서 제외되어 각종 위기 대책에서도 배제되는 최근 상황에는 대단히 큰 문제가 있다. 문제는 극히 불안정한 이들의 규모를 그대로 둔 채 ‘전국민 고용보험제’가 시행가능하느냐다. 사용자가 불분명한 특수고용, 플랫폼 노동자의 경우 보험료를 누가 부담할지에서부터 논쟁이 되고 있다. 가장 현실적인 문제는 실업급여에서 발생한다. 극단적으로는 6달 동안 월 1만원 남짓 보험료를 납부하면 3달 동안 최저임금 수준의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다. 코로나19 이후 미국의 실업률이 가파르게 치솟은 것은 불안정한 노동소득보다 아예 일을 하지 않을 때 받는 실업수당이 더 크다는 데에 기인한다. 한국노동연구원(장지연)은 고용보험 피보험자 실업발생률 0.9%를 근거로 특수고용, 자영업자까지 가입을 확대해도 추가지출액이 2조8천억에 불과하다고 추계한다. 이 추계는 특수고용, 플랫폼 노동자, 자영업자의 실업발생률이 훨씬 높을 것이라는 점을 간과한다. 더 나아가 불안정 노동의 규모가 커질수록 고용보험제의 지속도 어렵다.
한편 보험료 납부자를 매칭시켜 사각지대를 해소하자는 정부의 접근(민주노총의 방안도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과 달리 박원순 등 민주당 인사들의 방안은 고용보험료를 조세화하자는 것이다.(한국노동연구원 장지연의 방안이기도 하다.) 이윤(기업소득)에 비례한 보험료 부과는 어느정도 소득재분배에도 기여할 수 있다. 이 방안에서 문제는 자영업자들이다. 자영업자의 경우 소득감소를 사유로 폐업해야 실업급여를 수급할 수 있는데, 사업의 폐업은 이미 상당한 손실을 의미하는 것이어서 단기간의 실업급여로는 그 손실이 메워지기 어렵다. 이 때문에 자영업자들 입장에서 고용보험가입은 실익 없는 비용이 추가되는 꼴이 되는데, 노동시장에서 밀려나 저수지 역할을 하고 있는 고용원이 없는 자영업자나 소규모 자영업자들에게 분배적 조세를 부담시키는 데에는 무리가 있다.
참고문헌
ㆍ류만희. (2005). 고용보험제도의 10년 평가와 과제. 참여연대 월간복지동향.
ㆍ이상동. (2009). 전국민 고용보험 제도 도입 방안 연구.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ㆍ한국노동연구원. (1997). 1990년대의 노동시장 변화와 노동시장 정책과제.
ㆍGoudima T., Rybalko L.. (1996). Social Insurance in Russia: History and Contemporaneity. NFT, 4/1996, 342-350.
ㆍLitvack, Jennie I.. (2011). Social safety nets : an evaluation of World Bank support, 2000-2010 (English). Washington, DC: World Bank.
ㆍ이준영, 김제선, 박양숙. (2015). 『사회보장론』. 학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