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적’ 정치세력화 운동 평가와 우리 운동의 과제
강문식(아래로부터전북노동연대 사무처장)
*이 글은 5월 30일 체제전환운동 집담회에 제출한 발제문을 수정한 글입니다.
22대 총선과 ‘독자적’ 정치세력화 운동 평가
제22대 총선이 더불어민주당, 조국혁신당의 압승으로 마무리되었다. 윤석열 정권, 국민의힘의 패배했으니 민중이 정권을 심판한 것이라며 기뻐해야 할까? 그렇지 않다. 진정 패배한 것은 노동자운동이다.
이번 총선은 그 어느 때보다 노동, 사회정책이 쟁점이 되지 못한 선거였다. 민주노총을 비롯한 노동ㆍ사회운동 세력의 총선 요구가 큰 힘을 얻지 못한 것은 우리의 힘이 부족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다수 운동진영이 독자적 정치세력화를 포기해버린 결과 민중의 목소리가 더 희미해져버렸다.
이번 총선을 앞두고 수많은 시민사회 원로들이 민주당과 조국혁신당 곁으로 달려가 검찰독재에 맞서자고 부르짖었다. 진보당은 위성정당에 들어가 민주당과 연합했고, 민주노총은 진보당 지지를 철회하지 않으면서 자신이 정한 정치방침을 스스로 무너뜨렸다. 결국 산별연맹이 제각각 정치방침을 수립하면서 민주노총의 지도력 자체가 훼손되었다. 앞으로 다가올 각종 선거에서도 민주노총의 정치방침은 현장에서 작동하기 힘들 것이다.
물론 이번 총선 한 번으로 이르게 된 결과가 아니다. 1990년대에 당시 노동·사회운동진영이 시민운동과 스스로를 구별지으며 정치운동의 과제로서 공유했던 최소한의 지반은 ‘독자적’ 정치세력화였다. 하지만 정치세력화 운동은 출발부터 그 내부에서 민주당 세력과 연합하여 반보수 전선을 만들어야 한다는 대연합론과 대립해왔다. 김대중, 노무현 비판적 지지론, 반보수대연합론 등 매 선거마다 대연합론은 독자적 정치세력화 운동에 격랑을 일으켰다. 22대 총선에서 진보당과 민주노총 내 다수파가 보인 모습은 매 선거 시기에 대두되던 대연합론의 연장선상에서 그리 낯설지 않다. 그래서 22대 총선에서 더 극적으로 드러난 것은 대연합론의 득세보다는, 독자적 세력화를 지향하거나 그것에 우호적이었던 운동세력의 축소이다. 진보당 이외 나머지 진보정당들이 얻은 저조한 지지율은 ‘독자적’ 정치세력화라는 지향이 운동진영 내·외부 모두의 외면을 받은 결과다.
결국 정당운동을 향한 외재적 평가는 실효성이 낮다. 특히 2017년 이후를 냉정하게 돌아보면 진보정당 뿐만 아니라 ‘우리’ 다수는 “OO개혁” 담론을 흡수해버린 민주당 세력과 분별 정립하지 못했다. 방향에서의 차이를 드러내지 못하니 운동세력은 요구의 급박성으로 민주당과 경쟁하게 됐다. 그래서 우리의 평가는 지난 시기 우리의 운동이 노동자·민중의 독자적 사회 전망을 제시하겠다는 정치운동의 기획을 완성하지 못한 사실로 돌아가야 한다. 운동의 쇠퇴가 운동을 대연합론으로 이끌고, 대연합론은 운동의 쇠퇴를 가속화했다.
운동의 주체적 조건
운동의 쇠퇴는 거대담론의 실각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교차성 내지 정체성의 정치가 보편성을 대체할수록 운동의 총합은 의제의 나열로 수렴되고 있다. 거대담론의 실각은 정세 논쟁이 실종된 운동의 현실과 불가분하다.
종래의 사회주의 이념을 계급투쟁과 민족해방(반제국주의) 두 축으로 나누어볼 때 특히 전자의 실각이 더 급속하다. 거대담론의 실각을 애석해하는 좌파 그룹 중에는 정세 분석의 대부분을 서방 대 반서방 구도의 진영론에 할애하는 이들이 상당하다. 여기에서 한국을 비롯한 미국, 중국 경제에 대한 객관적 진단은 결여된다. 한국은 여전히 반식민지, 혹은 신식민지 종속국가이고, 미제국주의가 주타방(주요타격방향)인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이 자리에서 이를 주제로 토론하자는 것은 아니다. 이런 토론이 실종됐음을 질문하고 싶다.
설사 미국 주도 세계질서의 질타에 경제 정세를 곁들인다 해도 ‘일반적 위기’, ‘만성화된 저성장’ 식의 간소한 진단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2023년 초 운동조직 다수는 그 해에 경기침체(스태그플레이션) 또는 ‘대공황’이 도래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나 그 전망들은 모두 빗나갔다. 전망 자체야 빗나갈 수도 있다지만, 사업계획이 비관적 전망에 부합하지 않는 현실도 짚어볼 문제다. 정세 논쟁이 사라진 운동, 운동과 정세분석의 불일치는 서로 같은 말이다.
스태그플레이션을 전망한 논자‧단체들 대부분은 자본주의 경제에 대한 발본적 비판을 제기하는 외양을 취하면서도 주장의 근거를 매파 주류경제학자들에게서 가져왔다. 미국 경제학계에서 폴 크루그먼 등과 대립각을 세우며 매파를 자임한 래리 서머스를 인용한 사회진보연대의 정세분석이 대표적이다. 인플레이션을 문제 삼는 시각 자체가 신고전파‧새케인스주의의 주장을 토대로 한 이해라는 점도 마찬가지다. 주류경제학의 인플레이션 대응은 물가와 고용 사이의 교환관계를 전제한다. 그래서 임금-물가 나선효과를 우려하며 고용축소와 경기냉각을 인플레이션 대응책으로 사용한다. 신고전파‧새케인스주의의 논지를 빌려 스태그플레이션의 도래를 전망하면서 노동자의 권리를 방어할 묘안을 만들어내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심지어 인플레이션을 화폐적 문제로 이해하는 통화주의적 서술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이 경우 노동력이 투입되는 상품생산과 물신화된 자본이 스스로를 증식하는 과정이 서로 다르며, 마찬가지로 양적완화 정책을 통해 공급된 유동성이 M2(광의의 통화)를 증가시키지 못했고 다만 자산가격을 상승시켰음을 구별 짓지 못한다.
자본주의 ‘대공황’, ‘붕괴’가 도래한다는 전망은 위와는 다소 결이 다르다. 구체적으로 인용해보자면, 노동자신문, 노동전선, 노사과연 등에서 글을 쓰는 신재길은 2008년 금융 공황으로 국제독점자본주의(신자유주의) 체제는 붕괴되었다고 진단한다. 여기서 붕괴는 패권교체를 의미한다. 신재길은 러-우 전쟁과 앞으로 도래할 대공황이 새로운 체제로의 이행 과정이 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이러한 전망을 공유하는 세력은 상당히 광범위하다. 민주노총 역시 자본주의의 심각한 위기와 미국 헤게모니의 쇠퇴, 다극체계로의 전환을 2023년 정세전망 초안에 담았었다. 여기서 쟁점은 결국 중국이 미국 헤게모니를 대체할 수 있는지에 있다. 중국, 러시아 등 소위 다극체계에서의 주요 국가들의 성격도 쟁점이다. 오히려 노사과연 채만수 소장은 누군가 러-우 전쟁이 미제국의 종언을 가속화하고 있다고 본다면 그것은 ‘헛것을 보는 것이다’라고 일갈한다. 또한 남미에서 ‘반미자주국가’·‘반제자주국가’로 규정되고 있는 정치적 경향은 제국주의·독점자본의 지배·착취 체제의 유지·강화에 복무하고 있을 뿐이라고도 지적한다.
비슷하게 ‘붕괴’를 전망하지만 그 전망이 어떤 당면 과제를 제시하는지는 불투명한 경우도 있다. 익히 알려져 있듯 과천연구실은 1997년에 한국 경제가 이미 붕괴했다고 진단했고, 2012-13년에는 미국경제의 최종적 위기가 시작될 것이라고 전망한 바 있다. 이외에도 국‧내외에는 자본주의의 위기를 둘러싼 다양한 입장이 있는데 결국 쟁점은 세계 자본주의 역사에 대한 입장에서 드러난다. 이들 입장에서 1970년대의 위기 이후 그 이전과 축적 양식의 변화가 있었고 수익성을 회복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1970년대 위기를 구조적 위기로 정의하는 데에는 대체로 이견이 없는 듯 하다. 그러나 2008-09년 위기 혹은 현재 시점의 자본주의를 바라보는 시각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앞서 자본주의의 위기를 세계체계론(헤게모니 순환)과 결합하는 과천연구실의 입장은 1970년대 이후 자본의 수익성이 줄곧 하락해왔고, 그렇기 때문에 붕괴가 도래할 것이라는 해석이다. 콘트라티예프 순환과 유사한 일종의 장기파동론이다. 마이클 로버츠는 보다 직접적으로 이윤율 하락 순환과, 콘트라티예프 하강 순환의 결합으로 2018년 무렵 커다란 위기가 도래할 것이라고 전망한 바 있다. 그러나 이윤율 실증 추계는 다양한 쟁점이 존재한다. 뒤메닐은 2000년대 이윤율이 상승하는 추세였다고 추계한다. 박하순 동지는 뒤메닐에 비판적이나 본인이 추계한 미국 법인자본 생산가격 이윤율이 마냥 하락 추세를 보이지는 않는다고 제시한다. (앤드루 클라이먼은 이윤율 하락이 광범위하게 관철되고 있다고 추계한다)
어느 쪽이든, 우리는 이론, 모형과 현실의 관계를 얼마나 진지하게 사고하고 있는지 돌아봐야 한다. 운동진영의 정세분석이 “우주의 가을”이 오고 있다는 식의 천동설이어서는 곤란하다. 이런 정세분석이 운동을 망쳐왔던 것은 아닌가?
운동의 과제
결국 운동은 현재와 다른 사회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정치이념 없는 운동은 확산과 유지에 한계가 있을 것이다.
운동진영이 민주당과의 분별에 실패하고 있지만 사실 민주당 역시 정치이념이 부재하다는 문제를 안고 있다. 민주당이 주로 내세우는 노선은 ‘김대중 정신’, ‘노무현 정신’이지만 이 용어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는 그 말을 사용하는 때와 장소에 따라 시시각각 변한다. 애초 모순되고 굴곡질 수 밖에 없는 사람의 일생에서 일관된 무엇을 뽑아내기란 어려운 일이며, 그 변동성이 인명을 자신의 노선으로 삼을 때 가질 수 있는 이점이다. 이재명 대표의 사당화도 정치이념의 부재 때문에 가능하다. 세계적으로도 페론주의, 룰라주의, 차베스주의 등 다양한 좌파 포퓰리즘이 내적 곤란을 겪었다. 정의당의 곤란 역시 끊임없이 소환되는 ‘노회찬 정신’에 일정 지분이 있을 것이다.
전북노동연대는 10여년 전 출범하며 “좌우 정파를 떠나 지역의 동지들이여, 현재의 운동적 위기 상황에 응답하라. 변혁적 관점 하나만 일치한다면 그 이후는 동지들이 결정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변혁적 관점’이라는 공통의 비전은 시간이 지나면서 불투명해지고 구심력보다는 원심력이 커져 온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방향을 벼릴 때 운동이 지향할 경제‧정치제도와 대안사회의 구체적 비전이 마련되어야 한다. 추상적인 수준의 운동원칙을 넘어서는 사회적 요구가 만들어져야 할 것이다. 이 때 거대담론을 내려놓은 채 의제를 나열하는 방식은 공동의 비전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레닌은 자발성과 의식성의 긴장을 인식했던 혁명가였다. 의식성을 자발성보다 우위에 뒀던 혁명가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개인적으로는, 의식성을 우위에 두는 데 반발하며 자발성을 우위에 두어야 한다는 이념 하에 운동을 시작했다. 지금은 자발성과 의식성의 관계 역시 변증법적 원리가 적용되고, 둘 사이의 관계는 고정불변이 아니라는 것으로 관점이 바뀌었다. 실상, 우리는 자발성과 의식성의 긴장 가운데 그 어느 쪽도 부여잡지 못했다는 쪽이 객관적 평가일 것이다. 이념의 쇠퇴가 가속화되는 현 정세에서는 ‘자발성’을 상대화하고 ‘의식성’을 강화해야 한다. 의식성의 성장 가운데 자발성도 가능할 것이다. 대중조직은 기본적으로 자발성이 우위에 있을 수밖에 없는 조직이다. 이념의 쇠퇴라는 정세 가운데 대중조직 안에서 우리의 활동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 것인지가 관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