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자치담론의 한계와 전북특별자치도 출범
강문식(아래로부터전북노동연대 사무처장)
*이글은 5월 22일에 진행한 전북노동연대 회원 워크숍 발제문을 수정·보완하였습니다.
발전주의 패러다임은 ‘발전’을 중대한 사명으로 삼은 국가 중심 성장전략으로 특징 지워진다. 한국, 대만 등 동아시아 (반)주변부 국가의 수출지향산업화와 고성장은 발전주의의 따라잡기(Catch-up) 환상을 상징한다. 그러나 세계적 차원에서 조망하면 발전주의 황금기를 구가하던 1950-60년대에도 중심부(core)-북반구-와 주변부(periphery)-남반구-의 격차는 결코 좁혀지지 않았다. 이를 두고 세계체계론은 중심부의 발전과 주변부의 저발전은 동전의 양면이라고 지적한다.
발전주의 패러다임에 균열이 생긴 것은 이윤율 하락이 심화된 1970년대다. 자본의 수익성 악화가 발전주의의 물질적 토대를 무너뜨리면서 따라잡기와 낙수효과의 환상도 함께 거둬지게 되었다.
한국에서의 발전주의는 박정희 정권의 7차에 걸친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으로 대표된다. 해외에서 자본과 원료를 수입하고 값싼 노동력으로 상품을 생산하여 수출하는 수출지향공업화 전략이었다. 한국 경제에서 제조업의 비중은 1962년 10%에서 1990년대 30%대로 크게 성장한다.
한국에서 발전주의는 권위주의적 국가통치전략과 결합된 경제산업정책을 의미했다. 저곡가 정책, 노동기본권 부정 등의 국가 정책은 농촌에서 도시로 노동력을 강제 동원시키기 위함이었다. 국가주도 산업 정책은 특혜에 힘입은 대자본(재벌)의 성장으로 이어졌다. 국가주도 발전전략은 동시에 지역간 불균등 발전을 크게 심화시켰다.
이윤율이 하락하는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 가운데 발전주의 패러다임은 ‘큰 정부’의 비효율성이 경제위기의 원인이라는 이데올로기로 대체되었다. 발전주의를 대체한 신자유주의는 자유무역과 세계화 담론으로 무장한 채 시장과 국가를 대립시키며 국가 개입을 금지하는 ‘이데올로기’였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시대에도 자본 이동의 자유와 비상품의 상품화를 통한 시장의 확대를 위해 국가의 개입은 고도화되었다. 신자유주의는 ‘큰 정부’에 대립하는 담론으로 ‘지방’, ‘지역’을 소환한다. 지역의 지식과 기술의 시장성, 경쟁성을 강조하며 지역주의에 기초한 성장전략을 강조하는 것이다. 지역발전의 책임도 국가에서 지방으로 이전되었다.
1970년대 세계적 이윤율 저하와 맞물려 한국에서도 1979년에 GDP가 역성장하며 경제위기를 맞게 된다. 박정희 정권의 발전전략은 그 권위주의적 성격과 함께 불신임 받게 되며 섬유산업 노동자의 조직적 저항, 부마항쟁, 10.26 등을 걸쳐 정권의 종말로 이어지게 되었다. 박정희 정권이 경제위기 대응으로 시행하려던 경제안정화종합시책(79.4.)은 전두환 정권으로 이월된다.
경제 안정화는 재정긴축과 물가안정을 의미한다. 경제안정화종합시책의 주요 정책 목표는 인플레 단절, 개발속도 조정, 시장기능 제고, 긴축기조 견지 등으로 시장기능을 강화하고 정부 개입을 축소한다는 정책원칙을 골자로 했다. 12.12 쿠테타 이후 집권한 전두환 정권도 안정화 시책의 기조를 유지하며 정책금융을 중단하고 중화학 공업 구조조정, 시장 개방을 시도한다. 경제안정화종합시책은 신자유주의의 다른 이름이었다.
한국에서는 신자유주의 개혁이 ‘민주화’로 수용된 측면이 있다. 큰 정부의 작은 정부로의 전환이라는 신자유주의 담론이 권위주의적 국가통치전략의 민주적 전환으로 이해된 것이다. 전두환 정권의 경제 정책을 총괄한 김재익이 “내가 시장경제를 도입하면 정치의 민주화는 당연히 따라온다”고 한 말은 상징적이다. 권위주의적 정권의 정책 입안자조차도 신자유주의 개혁을 권위주의적 국가통치전략과 구분지었을 정도이니 그에 대당하는 민주화 운동에서 신자유주의 담론을 수용한 것은 그리 어색한 일이 아니다. 한국의 민주화 담론에서 지방자치는 권위주의적 사회체제의 민주적 전환의 매개였고, 중앙정부의 권한과 역할을 지방정부로 이전하는 것이 탈권위주의적 사회로 이행하는 과제로 여겨졌다. 더 나아가 민주주의는 지방자치와 등치되었고, 민주주의 역사는 지방자치의 역사라고까지 선언되었다. 개별 시민이 주권자로서 정책과정에 참여해야 한다는 민주화 운동의 지향 역시 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반영한다.
1980년대 권위주의 체제에 맞선 민주화 운동의 과정에서 지방자치 담론은 점차 성장했고, 1987년 6.29 선언에는 지방자치를 실시하겠다는 내용이 포함된다. 같은 해 개헌과 이듬해 지방자치법 제정으로 지방의회가 만들어졌고 1991년에는 광역, 기초의회 선거가 시행되었다.
지방자치제도가 본격화된 지 30년을 훌쩍 넘겼지만 ‘자치’ 성적표는 어떨까? 지난 30년 간 무엇보다 뚜렷하게 관찰되는 것은 지역 간 격차의 확대다. 특히 전세계적으로 저성장이 만성화된 2000년대 이후 한국에서도 고성장지역과 저성장지역의 구분이 확연해졌다. 지역내총생산과 지역내총소득의 추이를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수도권과 비수도권 사이에는 그 추이에 뚜렷한 차이가 관찰된다. 광역수도권은 지역내총생산과 지역내총소득이 모두 꾸준히 증가했고, 서울은 지역내총생산은 감소하는 반면 지역내총소득은 증가했다. 반면 비수도권은 지역내총생산이 감소하면서 동시에 지역내총소득이 더욱 큰 규모로 감소한다. 서울 및 수도권과 비수도권 사이에 식민지적 관계가 형성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특히 전북, 전남, 경북, 강원은 성장은 후퇴했지만 역외유출은 증가한 저성장지역이었다.
혹자는 이와 같은 불균등 발전의 원인을 지방자치의 미완성에서 찾으며 여전히 지방분권의 강화에서 해법을 구한다. 그러나 지역 불균등 발전이 ‘지방자치’ 그 자체에서 비롯하지 않는지를 묻는 편이 훨씬 현실에 부합한다. 지방자치제도가 신자유주의적 작동 원리에 기초하는 이상 그 민주적 외양과 반대로 지역 간 격차 확대에 기여할 것이기 때문이다.
특별자치도 출범은 지방자치 담론의 연장선상에 있다. 특별자치도는 ‘도’의 자치 권한을 강화한 지방자치단체의 한 형태로 정의된다. 지방자치 담론의 일각은 미국, 독일 등 연방제 국가를 준거점으로 삼는다. 특별자치도는 연방제 수준의 지방자치의 모델로 사고되기도 한다. 특별자치도의 영문 표기는 Province(도)와 State(연방)가 혼용되고, 오영훈 제주지사는 특별자치도 분권모델이 연방제 수준까지 나가야 한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 지역이 독립된 경제 단위일 수 없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이는 물질적 토대를 무시한 공상적 발상에 불과하다.
현재 한국에는 제주특별자치도(2006), 강원특별자치도(2023), 전북특별자치도(2024)가 설치되었다. 공교롭게도 GRDP 구성비(2022)가 낮은 자치단체는 제주, 강원, 전북 순이다. 상용노동자 월 급여액이 낮은 자치단체 역시 제주, 강원, 전북 순이다. 이 세 곳에서 특별자치도가 설치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역외 유출이 심화되는 저성장 지역에서 그 타개책으로 자치권 확대를 선택한 것이다. 자치권 확대를 성장 전략으로 받아들이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 아래에서의 필연적 선택이다. 고성장지역에서는 순수하게 시장을 향한 욕망이 작동한다면, 저성장지역에서는 따라잡기라는 발전주의 패러다임이 공존한다는 사실이 역설적이다.
그러나 자치를 통한 따라잡기는 신기루에 불과하다. 자치담론이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 토대를 둔 이상 (지방)정부의 기능은 시장의 확대에 국한된다. 지방정부의 자치권 역시 규제완화를 의미할 뿐이다. 전북특별자치도법의 요지도 개발사업에서의 규제완화에 있다. 법은 전북에 대한 규제자유화의 추진을 국가의 책무로 정하고, 개발 시 환경영향평가 등을 우회할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와 같은 규제완화 경쟁은 타 지방정부와 차별성을 가질 수 없으며 바닥을 향한 경쟁으로 귀결될 뿐이다. 이미 전북특별자치도가 추진하겠다고 내세운 케이팝 학교는 충남, 울산, 부산에서도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군산형 일자리가 대표하듯 노동조건의 상한을 제한하는 기업유치 전략도 실패할 수밖에 없다. 단순 양적 지표로만 보면 전북의 노동시장은 일자리 부족보다 구인난이 심각한 실정이다. 전북의 인구감소 속도가 매우 가팔라지고 있다. 특히 30~40대 생산인구 감소가 두드러진다. 이러한 지역소멸 위기는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누적된 효과로 이를 또다시 신자유주의 처방으로 극복해보자다는 시도는 어불성설이다.
한국 저성장 지역이 공유하는 낮은 성장과 높은 역외유출은 전형적인 식민지적 속성이다. 그러나 ‘독립’ 또는 자치가 그 해법일 수 없음은 앞서 이야기했다. 주변부가 택한 규제완화 성장 전략의 가장 큰 수혜자는 도리어 중심부가 된다. 주변부의 규제완화에 힘입어 중심부의 규제완화가 더 수월해지기 때문이다. 규제완화의 효과는 중심부일수록 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성장의 과실도 중심부 성원 전체가 나눠 갖는 것은 아니다. 그 안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격차가 존재하며, 대개 식민지로부터 이주한 이들이 하층을 구성한다. 그래서 지역 불균등 발전에 대한 사회운동의 과제는 한국 사회가 내부 식민지를 인식하도록 들춰내고, 중심부의 규제를 강화하는 데 있다. 지역에서는 이차전지 산업을 포함해 규제완화에 힘입어 전북으로 진출하는 기업들에 노동·환경 기준이 후퇴하지 않도록 감시의 눈길을 늦춰서는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