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지역 사회운동 약사 – 상설연대체를 중심으로

전북지역 사회운동 약사 – 상설연대체를 중심으로

강문식(아래로부터전북노동연대 정책교육국장)

1. 범민주연합과 전국연합

한국 현대사에서 사회운동의 주요 형태 중 하나는 전선체(상설연대체)로 나타난다. 그 흐름을 개괄하면, 군부독재체제 하에서 군부세력을 정점으로 하는 파쇼적 지배블록에 맞서는 ‘범민주연합전선’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이 연합전선의 실질적인 중추세력은 청년-학생층이었는데, 이들은 크게 보아 통일운동을 중시하는 ‘민족해방(NL)파’와, 계급모순의 해결을 중시하는 ‘민중민주(PD)파’로 분화했다. NL파이든 PD파이든 변혁운동의 중심은 노동자계급을 비롯한 기층민중이어야 한다는 점에서는 인식을 같이했는데, 청년-학생세력 및 기층 민중세력을 ‘진보세력’이라고 부른다면, 당시에 성립된 ‘범민주연합’은 크게 보면 지배블록에 대항하는 자유부르주아세력과 진보세력 간의 연합체였다고 볼 수 있다.

87년 6월 항쟁은 ‘범민주연합전선’이 주도하였으나 항쟁의 최대 수혜자인 자유부르주아 야당세력이 피지배블록에서 이탈하기 시작하면서 피지배블록은 NL파를 중심으로 통일운동을 자신의 새로운 운동영역으로 개척하게 되었다(김세균, 2001). 또한 87년 항쟁을 계기로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등과 같은 전국적 대중조직이 결성되면서 이들 조직 대중이 대중 투쟁을 이끌게 되는 운동 주체적 조건의 변화도 발생한다. 이러한 변화된 운동의 주체적 상황에 맞춰 NL파를 중심으로 상설적인 대중조직의 연대틀을 구성해야 한다는 요구가 운동사회 내에서 제기되었고, 이것이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이하 전국연합)의 결성1으로 이어진다.

전국연합 결성 이듬해인 1992년 대선에서 전국연합은 민주정부수립을 위한 ‘범민주진영의 후보단일화’를 정치방침으로 결정하고, 민주당과의 협상을 통해 ‘민주개혁과 민주정부 수립을 위한 전국연합·민주당의 합의사항’을 발표하며 김대중을 범민주단일후보로 선정했다. NL파는 ‘민주대연합’의 유지를 중시해 김대중 세력으로 대표되는 자유부르주아세력에 대한 ‘비판적 지지’ 노선을 견지한 반면, PD파는 변혁세력의 독자적 세력화와 노동자-민중 헤게모니에 의한 자유부르주아 헤게모니의 대체(김세균, 2001)를 추구했다는 차이가 있었다. 전국연합의 ‘범민주단일후보’ 노선을 비판하던 세력에도 여러 갈래가 있었으나 크게 보면 이들은 백기완 민중후보 선거대책본부로 결집하여 독자후보 전술을 택했고, 이후에도 민주대연합론은 물론 전국연합 내 민족해방운동 중심성에도 일정한 거리를 두며 노동자·민중의 독자적 정치세력화에 착목했다.

1997년 대선을 앞두고는 6월 14일 개최된 전국연합 임시대의원대회에서 독자 후보 추진을 결정했지만, 11월 23일 다시 개최된 대의원대회에서는 민주대연합론을 고수하던 범민련계 주류 세력의 주장이 반영되어 ‘야권후보 단일화 촉구’를 결정하고 김대중 후보를 비판적 지지하게 된다(이창언, 2011). 이러한 과정에서 전국연합 자체가 주요 정치일정에 대응할 필요에 따라 결성되었던 점, 전선체 운동의 초기와 달리 대중조직이 급격히 성장한 점, 각 시민·사회운동이 자신의 영역을 명확히 하며 전문성을 확보하게 된 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상설적 연대체로서 전국연합의 역할이 점차 축소되어 갔다(김종섭, 2007; 이창언, 2011).

2. 전북연합의 해체와 신자유주의에 맞선 전북지역 전선 운동

이러한 흐름과 논쟁은 전북지역서도 비슷하게 나타난다. 1991년 11월 30일 발족한 민주주의민족통일전북연합(이하 전북연합)은 전북민족민주운동연합(이하 전북민련)의 인적·조직적 구성을 승계하는데, 전북연합 발족이 추진되는 과정에서 전북민련에 소속되어 있지 않던 주요 대중조직들까지 참여가 확대되었다(미상, 1991). 그러나 전북연합 초창기부터 전북노련 소속 200여 명의 노동자와 노동운동가들이 한국노동당 창당추진위에 참여하거나 백기완 민중후보 선거대책본부에 결합하는 활동을 전개하면서 민주대연합론으로 표상되는 통일전선론과의 긴장을 형성했다(남춘호·이성호, 2009; 한재일, 2007). 1996년에 출범한 민주노총전북본부도 전북연합에 대한 조직적 참여를 유보하고 참관하는 형태로 결합하는데 이 시기에는 이미 전북연합의 상설적 연대체로서의 성격이 약화된 상태였다. 1996년 12월에 구성된 ‘노동법·안기부법 범대위 전북본부’는 민주노총전북본부가 주도적 역할을 맡았고 전북연합은 개별 단체로서 결합하는 형태를 취한다.

전국연합 내 정치적 입장 및 전망의 상이함에 따른 조직적 결속 약화와 상설적 연대체로서의 역할 축소는 전북지역에서 보다 극적인 전개를 맞이한다. 전북연합 주류는 NL운동진영 중에서도 범민련계 운동과 지향을 달리하며 한총련 혁신을 주장했던 세력으로서 전국연합의 운동적 시효가 만료되었고 운동적 노선의 방향전환이 필요하다는 인식 하에 1998년 전북연합 해산을 결정한다. 이후 이들은 시민운동, 공동체운동, 북한민주화(뉴라이트)운동 등으로 분화했다.

전북연합의 해체는 전북지역 사회운동 단체들 사이에 구성되어 있던 연대 및 논의의 형식적 틀이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 때문에 IMF금융위기와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으로 인한 생존권 싸움이 전북지역 곳곳에서 산발적으로 일어나고 있었음에도 민중·사회운동 단체들은 사안별로 대책위를 구성하는 식의 대응을 전개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전북지역에 전선적 역할을 담당하는 상설적 연대기구가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되며 여러 축으로 전선체 구성이 추진된다.

그 첫 번째는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으로 인해 양극화와 실업문제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됨에 따라 이에 대한 대응으로 1998년에 전북도내 16개 단체가 참여하여 출범한 ‘반IMF!반신자유주의!고용실업대책전북도민운동본부(이하 도민운동본부)’였다. 도민운동본부는 전북연합 해체에 따른 상설연대체 부재 상황 속에서 IMF하에서 노동자들에게 일방적으로 고통을 전담시켜온 김대중 정부의 정책기조를 반대하고 노동자의 생존권을 보호하기 위한 전선적 성격을 담당했다.

3. 민중운동과 시민운동의 분화

1998년 3월에 소집된 도민운동본부 구성을 위한 간담회에는 27개 단체가 참여했으나 16개 단체만이 최종적으로 결합했다. 이때 도민운동본부에 결합하지 않은 단체들은 경제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노동자들에 대한 정리해고가 불가피하며 노동자들이 고통을 분담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김대중 정부에 대해서는 사회운동진영이 협력적으로 대해야 한다는 문제의식도 있었다. 시민운동진영과 민중운동진영이 분리되기 시작한 것이 이 즈음이다(조문익, 2009).

광주항쟁 21주년 기념 전북도민 결의대회(2001년 5월 18일). 이날 대회는 기조에 ‘김대중 정권 퇴진’을 포함시키는데 대한 입장 차이로 민중단체와 시민단체가 별도로 진행하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지역 내에 전북연합을 대체하는 최소한의 논의 틀이 있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에 바탕을 둔 한상렬 목사의 제안으로 전북시민사회단체협의회(이하 전북민사협) 구성이 추진된다. 논의 과정에서 전북민사협이 민중생존권 투쟁을 감당할 수 있는지, 혹은 전북민사협 내에 민중생존권투쟁에 관련한 협의기구를 둘 것인지의 문제가 거론되었다. 토론 결과 전북민사협이 민중생존권투쟁을 감당할 수 있는지를 단정할 수 없고 최대한 감당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내용의 미온적인 수준으로 정리된다. 전북민사협은 1999년 9월 20일에 문규현, 염경석, 한규채, 한상렬, 이민우를 공동대표로 선출하여 출범식을 가졌다.

전북민사협은 조직 구성의 특성상 느슨한 구속력을 가지고 있어서 대중조직 중심이 아닌 상층연대적 성격이 두드러졌다. 민주노총전북본부의 평가에 따르면 전북민사협은 출범 후 반년이 지나지 않아 ‘구체적인 사업계획을 내오기 어려운 실정이며 조직적 중심도 불투명하여 방향모색이 필요’한 상태가 된다. 전북민사협은 2001년 4월 경부터 단체 해체를 포함한 진로 논의를 진행하고 7월 16일 개최된 대표집행위연석회의에서 전북민사협 해소를 결정한다.

2001년 전북민사협의 해소 논의가 진행되는 기간에 5·18 기념 집회 개최를 두고 벌어진 논쟁은 전북지역 민중운동과 시민운동 사이 견해의 간극이 좁혀지기보다는 확대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당시 민중대회위원회(민주노총, 전농 등)에서는 광주항쟁 21주년 집회 기조를 “신자유주의 반대, 민중생존권 쟁취, 김대중 정권 퇴진”으로 정하자고 제안하였으나 전북민사협 내 시민운동 진영에서는 김대중 정권 퇴진이라는 기조를 수용할 수 없다고 맞선 것이다. 결국 둘 사이의 대립을 해소하지 못한 채 민중대회위원회와 시민단체는 5·18 기념 행사를 각자 진행하게 되었다. 이를 시민운동의 우경화 내지 체제 순화로 평가할 수도 있지만, 전북지역 시민운동의 주축 세력이 전선 운동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며 이탈했던 세력이라는 점도 참고하여 살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민중운동과 시민운동 사이의 입장 내지 태도의 차이는 이후 전북지역 주요 사안에서 비슷한 방식으로 반복된다.

4. 전북민중연대회의 출범과 제약

도민운동본부는 1999년 3월 실업자종합지원전북센터를 개소하여 실업자민간지원센터의 기능을 분립·강화하고 하반기에는 도민운동본부와 실업자종합지원전북센터의 통합운영을 결정하게 되면서 전선으로서의 성격을 해소한다. 이에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 비판적인 문제의식을 가지고 연대운동을 전개해온 단체들은 같은 해 9월경부터 도민운동본부의 전선체적 성격을 계승하기 위한 연대체 재구성을 추진한다. 그 결과 1999년 10월 4일 ‘신자유주의에 맞서 싸우는 전북민중연대회의(이하 연대회의)’2가 결성되었다.

그러나 연대회의에는 전농이 참여하지 않고 있어 전북지역 전체를 포괄하는 상설연대체로서의 기능을 수행하지는 못하였다. 당시 전농은 전북연합 내에서 해산 반대 입장을 지닌 세력과 함께 전주완주연합을 결성하는 데 참여했다. 전주완주연합은 2001년 전북통일연대로 확대되면서 NL운동 계열의 전북지역 전선체 역할을 담당한다.

비슷한 시기 전국적 차원에서는 약화된 전국연합을 대체하는 전선조직 재편 논의가 진행된다. 1999년 상반기에 민주노총, 전국농민회총연맹이 주축이 되어 민중대회 개최를 추진하고 이를 통해 상설공동투쟁체 발전의 토대를 구축하기로 하였다. 같은 해 하반기에는 민중대회를 기획·집행하기 위한 ‘신자유주의 반대 민중생존권쟁취 민중대회위원회’를 구성하고 2001년 3월 14일에는 민중대회위원회가 민중연대(준)로 전환 출범한다. 민중연대(준)에는 민주노총, 전농, 전빈련뿐만 아니라 기존의 전선체였던 전국연합도 가입단체가 된다.

전북지역에서도 전국적 흐름에 따라 상설연대체 구성이 추진되었지만 여러 이유로 진전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먼저 연대회의는 전국적 전선 형성 이전에 지역에서 전선이 형성되어야 하고 구체적인 지역 사안을 중심으로 연대를 강화해야 한다고 제기하며 중앙의 일정에 맞춘 상설연대체 구성 추진에 비판적 입장을 취했다.3

상설연대체 구성에 진전이 이루어지지 않은 보다 실질적인 이유는 전농과 NL운동 진영의 소극적 태도에 있었다. 일례로 WTO 및 교육개방반대 투쟁이 주요 의제로 떠올랐던 2003년에는 전북지역 민중운동 전체를 관통하는 WTO반대공동투쟁본부 구성이 추진되었지만 전농전북도연맹이 독립적으로 활동을 전개하면서 상설연대체로서의 위상을 갖추지 못하게 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진보연대 출범이 본격화되지 전까지 연대회의가 통일운동을 제외한 전북지역 민중운동 진영의 상설연대체로서 역할을 수행한다. 이 시기 연대회의는 새만금 사업 반대·WTO 반대·부안 핵폐기장 저지·전쟁 및 파병 반대 등의 의제를 주도적으로 제기하는데, 특히 새만금 사업과 핵폐기장 반대 운동은 전선운동과 주민운동을 긴밀하게 결합시킨 사례로 평가된다.

5. 한국진보연대 출범에서 전선체 운동의 퇴조까지

2005년 전국연합 대의원대회에서 대규모 연합전선체 건설 방침이 결정되면서 운동진영 내 상설연합체 건설 논쟁이 재차 펼쳐진다. 논쟁에서 주요한 비판은 민주대연합론, 즉 김대중·노무현의 대북정책을 계승하기 위해 2007년 대선에서 자유부르주아 세력을 비판적 지지해야 한다는 정치적 입장을 향했다. 전국민중연대의 운영이 사실상 자민통 계열 운동가들에 의해 좌우되었음에도 자민통계에서 새로운 전선체 건설을 추진한 것은 反신자유주의 전선을 표방하는 전국민중연대로는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추진해온 열린우리당 세력과 민주대연합을 추진하기에 부적합하다는 인식이 근저에 있었으리라 판단된다.4

또 다른 비판은 한국진보연대 출범이 상층에서의 결정으로 추진되면서 지역, 대중조직에서 충분히 논의되지 못했다는 측면에서 제기되었다. 2006년 10월 18일 개최된 전국민중연대 대표자회의에서 “진보진영 상설연대체 건설준비위원회를 각계에 제안한다.”는 안이 제출되었지만 지역단체 중에는 3곳에서만 찬성으로 표결했고, 민주노총도 공식적인 의결 단위에서 참여 결정을 내리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후에도 진보연대 가입안건은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에서 수차례 부결된다.

전북지역에서는 2007년 전북통일연대를 중심으로 전북진보연대(준)가 발족하면서 연대회의는 사실상 해소되는 길을 걷게 된다. 당시 자민통 계열이 집행하던 민주노총전북본부도 전북진보연대(준)에 참여하지만 이에 대한 비판과 논쟁이 계속 이어지다 2009년 대의원대회에서는 전북진보연대(준)를 강화하겠다는 내용의 사업계획에 대해 이를 폐기해야한다는 의견이 제출되기도 했다. 2010년부터는 민주노총전북본부가 전북진보연대(준) 회의 및 사업에 참여하지 않았다.

2010년 이후에는 사안별 대책위나 시국 사건을 중심으로 구성된 연대체에서 민중운동 단체들의 연대가 이루어졌다. ‘버스파업해결과 완전공영제 실현을 위한 전북지역시민사회단체 대책위원회(2010년 결성, 2014년 전주시내버스 완전공영제 실현 운동본부로 개편)’, ‘한미FTA폐기, 이명박·한나라당심판 전북도민운동본부(2011년 개편, 2006년 결성된 한미FTA 저지 전북도민운동본부에서 개편)’, ‘민중총궐기 전북준비위(2015년 결성)’, ‘백남기농민 국가폭력 진상규명! 책임자처벌! 박근혜정권 규탄! 전북투쟁본부(2016년 결성)’ 등이 민중운동단체가 주도하거나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참여 단체에 연속성이 있던 민중운동 연대체이다. ‘국정원 정치공작·대선 개입 진상규명 및 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전북시국회의(2013년 결성)’, ‘세월호 참사 전북대책위(2014년 결성)’, ‘박근혜정권퇴진 전북비상시국회의(2016년 결성)’는 민중운동 단체 외에도 시민운동 단체가 함께 참여하였다.

〈표 1〉 전북지역 주요 연대체의 성격과 이념적 스펙트럼 개괄(조문익(2009)의 표를 일부 추가해 재구성)

연대체시기성격중심단체PDNL시민운동뉴라이트
전북연합1991~1998민족민주운동의 전선적 조직전농·전북총련·전북노련
고용실업대책 전북도민운동본부1998~1999고용실업문제를 중심으로 한 신자유주의 반대 공동투쟁체민주노총
전북민중연대회의1999~2007년경신자유주의 반대 공동투쟁체민주노총
전주완주연합1999~2001전북연합 해체 후 민족해방운동 중심의 전선적 조직전농
전북민주시민사회단체협의회1999~2001전북연합 해체 후 지역 운동 단체의 상설적 협의체
전북민중대회위원회2001~2002신자유주의반대 민중생존권 쟁취공동투쟁체민주노총·전농
전북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2001~시민운동단체의 네트워크 조직
전북통일연대2001~2008민족해방운동 중심의 전선적 조직전농
전북진보연대(준)2008~민족해방운동 중심의 전선적 조직전농·통합진보당
버스대책위2011~지역의제를 중심으로 구성된 민중운동 진영 연대체민주노총
세월호참사전북대책위2014~세월호 참사 계기로 구성된 민중·시민사회단체 연대체민주노총·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민중총궐기 준비위2015~2016일시적으로 구성된 민중운동 진영의 공동투쟁체민주노총·전농
백남기농민 투본2016일시적으로 구성된 민중운동 진영의 공동투쟁체민주노총·전농
박근혜퇴진 비상시국회의2016~2017일시적으로 구성된 민중·시민사회단체 연대체민주노총·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6. 정리

이상의 경과를 몇 가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90년 대 이후 전선체의 성격을 둘러싼 전북지역 운동사회 내 입장차이가 존재했다. 그 차이는 대선과 같은 주요 정치일정에 대한 대응방향에서 극명하게 드러나는데 당시 민족민주운동 계열에서 주도한 전국연합은 통일전선론과 민주대연합론에 입각하여 김대중 후보 비판적 지지를 선언했지만, 독자적 정치세력화에 주목한 세력은 백기완 민중후보 운동에 적극적이었다. 전북노련은 대체로 통일전선론에 비판적이거나 미온적이었기 때문에 전북연합에 참여하긴 하였으나 사안별 결합에 그쳤고, 1기 민주노총전북본부도 전북연합에 참관하는 형태로 결합했다. 그 이후로도 민주대연합론에 기초하여 한국진보연대나 새로운 연대체 출범이 추진된 한편, 이와 다른 입장을 갖는 운동진영은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주도한 세력과의 선긋기와 반신자유주의 전선이 필요하다는 비판을 제기하였다. 거칠게 개괄하면 신자유주의 경제정책 및 이를 추진한 자유주의 정치 세력에의 평가와 단절을 요구하는 입장과 보다 폭넓은 관계맺음을 통한 수구·보수 세력의 패퇴를 중시하는 입장 사이의 차이였다. 그렇다고 전자의 입장이 광범위한 운동세력이 소통하고 공동의 활동을 만들어내려는 노력을 도외시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보다 넓은 대중·대중운동과 만나고, 사회적 의제를 보다 다양하게 포괄하는 데 있어 후자의 태도로는 한계가 있다는 비판을 제기한 것으로 이해하는 편이 타당하다.

둘째, 전북에서의 전선체 구성과 변화는 중앙의 상황과 흐름을 같이 한다. 전국연합의 약화와 전북연합의 해체, 반신자유주의 연대체 구성, 한국진보연대 출범의 난항 등이 그러하다. 이는 주요 상설연대체 구성이 대개 중앙에서의 논의에 따라 이루어졌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지역과 대중조직에서 먼저 요구가 모아져서 출발한 것이 아닌 상층 중심의 상설연대체 구성 논의는 시간이 흐를수록 구심력이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한국진보연대 출범을 둘러싼 여러 논쟁 끝에 민주노총 의결기구에서는 최종적으로 한국진보연대 가입이 부결되었고, 민주노총전북본부 내에도 전북진보연대 참여를 둘러싼 쟁점이 드러났었다.

셋째, 민중운동과 시민운동 사이에 분리가 있었다.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한 민중운동과 시민운동이 서로 분리되는 과정에서 초기에 쟁점이 되었던 것은 신자유주의와 김대중 정권에 대한 입장 차이였다. 도민운동본부 구성단계에서 시민운동 진영은 정리해고·신자유주의에 대한 입장 차이로 참여를 피했고, 전북민사협 내에서도 신자유주의·김대중 정권 퇴진 구호 대한 입장 차이가 확인되면서 공동행사가 무산되었다. 이런 차이는 전북연합의 해체 과정에서도 배경을 찾을 수 있다. 전북연합 내에는 신자유주의·뉴라이트 이념을 수용한 그룹이 있었는데 이 그룹은 전북연합 해체 이후 시민운동으로 분화했던 세력과 인적·이념적 친화성이 있던 것으로 여겨진다. 2000년대 이후에는 민주노총전북본부를 비롯한 민중운동 단체와 시민단체는 상설적인 기구로 묶이지 않고 시국 사건과 같은 주요 사안을 중심으로 연대 관계를 가져간다.

본래 노동운동, 그리고 노동운동에서 가장 대중적인 조직형태인 노동조합은 그 출발점에서부터 정치적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현실 사회주의 국가의 붕괴, 신자유주의 경제체제 종속, 노동운동의 약화라는 조건의 종합적 결과로 정치적 노동운동/노동조합운동은 철지난 이야기처럼 여겨지는 것이 현실이다. 상설연대체는 노동운동의 정치성이 드러나는 주요한 조직형태 중 하나였다. 이 글에서 다루지는 못하였으나 한국사회에서 상설연대체의 약화는 노동운동의 정치성과 사회운동이 약화된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노동운동의 정치성 복원이 과거의 상설연대체 형식으로 귀결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한국 사회에서 전선체 운동이 범민주연합론의 자장 언저리에 있었음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노동운동과 사회운동 사이의 관계를 강조하는 ‘사회운동적 노조주의’ 개념이 제기된 지도 30년쯤 되었지만, 일견 당연한 이야기를 새삼 꺼내야 했던 것은 정치적 노동운동의 퇴조로 경제주의적 사조가 팽배해졌던 당시 서구 상황을 반영한다. 한국의 운동지형도 크게 다르지는 않은 것 같다. 다시 한 번 사회운동적 노조주의의 문제의식을 빌려와 덧붙이자면 다른 유형의 노동자들, 노동계급들-이를테면 노동조합 울타리 바깥에 있는 작은사업장, 간접고용, 이주, 여성, 장애 등-의 요구를 접합시키는 것이 지금 시기 노동운동이 착목해야 할 사회운동·전선운동의 내용일 것이다. 이와 같은 과제는 19세기 말~20세기 초 제국주의적 침략이 기승을 부리는 상황을 앞에 두고 누구보다 국제주의적이고자 노력했던 노동운동의 전통과도 상통한다.

참고문헌

· 김재훈, 김명아, 주종섭, 조문익, 남춘호, 이성호(2009), 《전북지역 민주노조운동의 전환과 모색》, 서울:한울아카데미

· 노중기, 진양명숙, 남춘호, 이성호(2009), 《전북지역 민주노조운동과 노동자의 일상》, 서울:한울아카데미

· 김세균(2001), 〈1987년 이후의 한국 사회운동〉, 《한국정치연구》 10

· 김종섭(2007), 〈진보연대에는 지역운동이 없다. 정치적 상층의 연대는 실패로 귀결〉, 《한국진보연대 출범, 이대로 좋은가?》 토론회 자료집

· 이창언(2011),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과 정치조직 논쟁〉, 《기억과 전망》 24

· 임미리(2013), 〈‘경기동부연합’의 기원과 형성, 그리고 고립〉, 《기억과 전망》 28

· 임필수(2007), 〈한국진보연대(준) 출범 현황과 문제점〉, 《사회운동》 71

· 미상(1991), 〈전북지역의 전선조직 논의를 위한 토론 제안서-전북민련과 국민연합 전북본부의 평가를 중심으로〉

· 한재일(2007), 〈(실록민주화운동사-36) 4.민중운동〉, 《새전북신문》

  1. 이 글은 《민주노총전북본부 20년사》에 수록한 〈민주노총전북본부와 전북지역 사회운동의 관계〉 원고를 수정하여 전북지역 사회운동의 일반적 현황을 다룬 글이다. ↩︎
  2. 민중연대회의의 명칭은 2002년 1월, ‘신자유주의 분쇄·민중생존권 쟁취·평화군축실현 전북민중연대회의’로 변경된다. ↩︎
  3. 전북지역 상설연대체 관련 전북민중연대회의 2001년 4월 4일 수련회 논의 결과 ↩︎
  4. 이 무렵 전국연합에서 한국진보연대 출범을 주도한 세력(혁신계)은 1997년 정치방침으로 김대중 비판적 지지를 결정했던 세력(범민련계)과 합법정당운동론에 입장 차이가 있음에도 통일전선론에 대한 동의는 공유되고 있었다. 범민련계가 합법정당운동론에 소극적이었던 것은 이미 한반도에 당 조직이 존재한다는 사고에 기인한다. 경기동부연합을 비롯한 한총련 혁신계는 2001년 9월 개최된 전국연합 대의원대회에서 소위 ‘9월 테제’를 통과시키고 이후 민주노동당에 집단 입당한다. ↩︎

Post Author: agent AI Uchi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