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데타에서 봄을 부르는 혁명으로
하성안(이윤보다인간을)

1. 쿠데타 직전까지의 간략한 미얀마(버마) 현대사
지난 2월의 돌연한 쿠데타 이후, 군부에 맞서 처절한 항쟁을 펼치고 있는 인민들의 피눈물이 하루하루 쌓여가고 있는 나라, 미얀마(버마).
70~80년대 이전에 태어난 이들에게는 ‘버마’라는 이름으로 더 친숙한 미얀마(버마)는 오랫동안 영국의 식민지배를 받다가, 민족주의자 아웅산 등이 주도한 해방투쟁 끝에 1948년 독립을 쟁취했다. 그러나 독립 직후의 혼란 속에 독립의 영웅 아웅산이 암살당하면서, 민족통합의 구심점이 상실되는 상황에 빠지게 되었다. 공산당 등 좌익과 민족주의 우익 간의 대립은 내전으로 격화되었으며, 버마족 주도의 중앙정부와 소수민족 간의 내전도 더욱 첨예하게 불붙었다. 이와 같은 항상적·전국적 내전 상황에서 무력을 소유한 군부 영향력은 점차 증대되었다. 마침내 1962년, (독립투쟁 당시 아웅산의 동지였던) 네윈 장군이 이끄는 군부는 정국의 혼란과 정부의 무능을 이유로 쿠데타를 일으켜 민주정부를 전복하고 권력을 장악했다.1
네윈의 군부독재정권은 모든 정당을 불법화하고 ‘버마사회주의계획당(BSPP)’를 창당한 뒤, ‘버마식 사회주의’라고 이름 붙인 고립적이고 후진적인 1당독재 체제를 버마 인민들에게 강요했다.
이후 80년대까지 겉으로는 안정된 지배가 이어지는 듯했지만, 수십 년 동안 이어진 독재와 국제적 고립 속에 낙후된 경제에 대한 인민들의 불만2은 나날이 쌓여 갔다. 이렇게 누적된 불만은 결국 1988년 학생들의 반군부시위로 촉발된 ‘8888항쟁’으로 터져 나왔다. 수개월 동안 대규모 시위와 총파업의 물결이 이어졌으나, 탱크까지 동원한 군대의 잔인한 진압 아래 항쟁은 차차 사그러들고 말았다. 이 항쟁의 과정에서 군부독재에 반대하는 민주세력은 ‘민족민주동맹’(이하 NLD)으로 뭉쳤으며, 그 대표인 ‘아웅산 수치’3가 저항의 구심점이 되었다.
8888항쟁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신군부가 등장했다. 구세력을 쿠데타로 몰아내고 집권한 그들은 BSPP 1당독재체제를 해체한 뒤, 비상기구로 ‘국가법질서회복평의회(SLORC)’를 구성해 또 다른 군사독재를 이어갔다. 항쟁의 잔인한 진압과 이어진 쿠데타에 대해, 국제사회의 경제제재와 민주진영의 불복종 투쟁 및 각 소수민족의 해방투쟁은 계속되었다. 결국 국내외적인 고립과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신군부는 NLD를 인정하고 협상의 장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후 민주화 이행조치로 합의한 90년 총선에서 NLD가 전 의석의 90% 이상을 얻어, 모두의 예상을 웃도는 압승을 거뒀다. 긴 군부독재 하에서 꾹꾹 눌러온 미얀마(버마) 인민들의 민주화를 향한 열망이 NLD에 대한 압도적인 지지표로 터져나온 것이다. 이에 당황한 SLORC는 (자신들이 관리한 선거였음에도 불구하고) 총체적 부정선거가 벌어졌다는 어이없는 핑계로 총선 결과의 승인을 거부했다. NLD는 다시 불법화되었고 탄압은 재개되었다.
이때부터 2010년대까지, 국제사회의 압박과 민주세력의 저항 속에 군부는 폐쇄체제와 탄압을 이어갔지만, 한편으로는 가중되는 부담 속에 (수치의 연금을 완화하는 등) 협상에 나서는 모습도 보여주었다. 그들은 가능하면 자신들의 독점적 특권을 유지한 채로, 미얀마(버마)의 국제질서로의 편입과 자신들의 지배체제의 안정화를 얻어내려는 태도를 보였다. 아웅산 수치와 NLD 역시, 국제적 지원과 인민들의 압도적인 지지에 기대어 투쟁과 협상을 오가며 신군부와의 힘겨루기를 지속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북한과 비슷한) 오랜 고립체제가 유엔의 강력한 경제제재에도 버틸 수 있는 근거가 되었고, 경제적 제재조치 외에는 민주화에 대한 실질적인 지원은 딱히 없는 답답한 상황이 길게 이어졌다. 이렇게 군부 대 NLD 사이의 ‘압도적 승자 없는 지루한 대결국면’이라는 정세가 고착되어 갔다.
2007년이 되자 엘리트 계층인 불교 승려들이 주도한 반독재 시위(샤프란 혁명)가 일어났다. 군부는 이번에도 군대를 동원해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이어 2008년에는 싸이클론이 강타하여 나라 전체가 초토화되는 자연재해까지 겹쳤다. 더 이상은 버티기 힘들어진 군부는 ‘이재민 구호’를 명목으로 국제사회를 향해 닫혔던 문호를 부분적으로 개방했고, 국내 민주세력에게도 일정한 양보를 제시했다.
군부와 민주진영 간의 협상 과정에서 ‘민주화 7단계 로드맵’이 작성되었다. 그에 따라 새 헌법 제정과 민주적 총선이 단계적으로 준비되었다. 그러나 민선정부로의 이행작업이 순조롭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새 헌법에 군부의 권력독점을 계속 유지하려는 의도가 명백한 반민주적 조항4이 삽입되자, NLD는 2010년 총선 참여 전면거부를 선언했다.
그렇게 NLD가 보이콧한 총선에서 군부가 만든 정당인 ‘연방단결개발당(USDP)’이 전체의석의 3/4 이상을 차지했다. 군부는 일방적으로 총선 승리와 그에 따른 민정이양 계획을 발표했으나, 그와 같은 반쪽짜리 선거로 구성된 사이비 민선정부의 정통성은 대내외적으로 부정되었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2011년 ‘테인 세인’이 대통령에 취임함으로써, 형식적으로는 군부독재에서 민선정부로의 정권이양이 완료되는 모양새를 갖추게 되었다.
아웅산 수치와 NLD의 고민은 깊어졌다. 형식적 민정이양 선거 이후 부분적인 대외개방까지 이어지면서, 점점 더 공고화되는 군부의 지배를 시위와 불복종운동만으로 종식시킬 가능성은 갈수록 약해지는 듯했다. 국제정세의 측면에서도, 미-중 G2의 패권경쟁 맥락에서 미얀마(버마)의 지정학적 중요성이 커졌고, 군부는 이 상황을 최대한 이용했다. 중국과 경제적·군사적 교류가 강화되면서 미국 주도의 UN 경제제재도 그 효력을 잃어 갔다.
이와 같이 변화된 정세를 반영하여, 아웅산 수치와 NLD는 (비록 한계가 명백하더라도) 현행 헌법 하의 총선에 참여하는 쪽으로 입장을 선회하게 되었다.
그렇게 2015년 총선에 참여한 NLD는 다시 한번 90년 총선과 비슷한 정도의 압승을 거뒀다. 그러나 선거에서의 압도적 승리에도 불구하고, 아웅산 수치와 NLD는 무력·경제력 등을 독점한 군부와의 권력분점을 받아들였다.5 자국민을 학살하는 데 조금도 주저함이 없는 군부와의 정면대결로는 앞으로도 승산이 없다고 보았고, 단계적인 민주화 이행과 개방조치가 장기적으로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낙관했던 것 같다.
한편 군부는 이미 자신들이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NLD 정부를 간판으로 내세우는 것이 국내외적 이미지 제고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사실 그들은 그 ‘간판’이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언제든지 갈아 치울 힘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아무튼 양측은 서로의 복잡한 계산 속에서 불안한 ‘동거정부’를 합의해 냈다. 한편 아웅산 수치는 헌법상의 봉쇄 조항에 막혀 대통령이 될 수는 없었으나, ‘국가고문’이라는 변칙적인 공직을 맡은 뒤 실질적인 국가수반으로 국정운영에 참여했다.6
이런 불안한 동거는 지난 2020년 11월 총선에서 NLD가 다시 압승7을 거둠으로써 돌이킬 수 없는 균열을 맞게 되었다. 총선의 승리로 아웅산 수치와 NLD는 군부의 영향력을 견제할 더욱 강력한 힘을 얻게 되었다. 미얀마(버마) 인민들 사이에서는 새로 구성된 정부에서는 민주화가 더욱 빠르게 진척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커졌다. 한편으로는 군부와의 불안한 동거의 균형이 완전히 깨질지도 모른다는 우려도 함께 고조되었다.
반면 기대 이하의 총선 성적표를 받아든 미얀마 군부는 중대한 선택의 순간을 맞게 되었다. 민주화를 피할 수 없는 대세로 인정하며 기득권을 내어놓고 다시 한 발 더 뒤로 물러설 것인지, 아니면 지금의 권력과 이권을 지키기 위해 자신들의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상황을 반전시킬 것인지…….
2. 쿠데타와 저항의 진행 과정
1) 기습적인 쿠데타와 ‘세 손가락’ 저항
모두 알고 있다시피 미얀마 군부는 후자를 골랐다. 전 국민을 적으로 돌려 온 나라를 피로 물들이더라도, 결코 지금 가진 권력을 놓지 않겠다는 선택을.
지난 2월 1일 새벽, 미얀마 군부는 전격적인 쿠데타를 일으켰다. 군대를 동원하여 주요 기관을 장악한 뒤, 아웅산 수치 등 정부 고위인사를 구금하고 1년간의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모든 권력은 최고사령관 ‘민 아웅 훌라잉’에게 이양되었다. 그들이 밝힌 쿠데타 이유는 NLD 정부가 지난 총선에서 부정선거를 저질렀다는 것이다. 선거인명부의 누락 등 각종 증거가 제시되었으나 누구도 그들의 주장에 동조하지 않았다.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반동적 군부의 무장 반란이라는 사실이 너무도 명백했다.

미얀마(버마) 인민들은 과거로 되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군부의 쿠데타가 발생한 바로 다음날부터 저항이 시작되었다. 처음 시작은 각자의 집에서 냄비와 그릇 같은 것을 두들기며 반쿠데타 구호를 외치는 ‘소음시위’였다. 침묵하지 않고 용납하지 않겠다는 저항의 조그만 용기는 이를 지켜보며 함께 한 평범한 시민들의 더 큰 용기로 이어졌다.
바로 이어서 병원 노동자들의 총파업이 개시되었다. 병원 노동자들은 영화 <헝거 게임>에서 저항자들이 사용한 ‘세 손가락’ 경례를 통해 자신들의 반쿠데타 저항 의지를 표시했다. 그 이후부터 이 ‘세 손가락’은 미얀마(버마) 반쿠데타 저항투쟁의 상징이 되었다. 2월 6일부터 양곤 등 대도시에서 청년-학생들과 (일부) 소수민족 해방조직,8 노동조합9과 인권-시민단체 등 군부에 저항하는 모든 세력이 총동원된 대규모 거리시위가 시작되었다. 학생을 비롯한 청년세대가 주축이 된 시위 참가자들은 SNS를 활용하여 국제사회와 전국 각지에 저항의 소식을 알렸으며, 이를 막기 위해 군부는 인터넷을 일시적으로 차단하기도 했다.
쿠데타 일주일째인 2월 8일에는 전국적인 총궐기가 있었다. 양곤, 네피도, 만달레이 등 전국에서 수십만이 참가하는 대규모 총파업과 시위가 있었다. 시위대의 요구는 다섯 개로 압축되었다. ①민주주의 실현, ②독재에 저항, ③08년 헌법 폐지, ④모든 정치범 석방, ⑤연방제 민주주의 수립이 그것이다. 쿠데타에 반대하는 광범위한 연대의 토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한편, 모든 권력을 장악한 훌라잉 장군이 쿠데타 이후 처음으로 TV에 나와, 1년 동안의 비상사태가 끝난 뒤 다당제 민주선거를 실시할 것이라고 회유하였다. 그와 동시에 쿠데타는 헌법에 보장된 군부의 고유권한을 행사한 것이라 강변하기도 했다.
2월 9일, 수도 네피도에서는 보안군(경찰)이 쏜 총에 19세의 여성이 맞아 중상을 입는 일이 발생했다.10 이날의 시위 진압과정에서 보안군은 물대포와 최루탄, 고무탄을 무차별 발사했으며 급기야 실탄까지 발사한 것이다. 이날 이후부터 쿠데타 군부는 전국 주요 도시에 계엄령을 내렸고, 야간 통행을 금지했으며, 시위대를 향한 무자비한 진압을 경고했다.
공포와 울분과 용기가 교차하는 속에 전국적인 저항은 계속되었다. 공무원까지 가담한 총파업과 대규모 시위는 매일 전국 각지에서 이어졌다.
2) ‘22222항쟁’과 ‘피의 일요일’, 그리고 끝없는 학살
진압군의 시위 진압은 갈수록 잔인해졌다. 비무장의 시위대를 향해 물대포, 최루탄, 고무탄, 새총 등을 닥치는 대로 쏘아댔다. 무저항의 시민을 향한 구타와 폭행, 실탄 발포도 계속 이어졌다. 2월 20일에는 만달레이 조선소 총파업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비무장 시민 2명이 총탄에 맞아 사망11했는데, 모두 머리 부분에 총상을 입어 저격수에 의한 조준사격이 의심되었다.
2월 22일, 미얀마(버마) 전국 각지에서 최대의 인파가 참여한 ‘1차 총파업’과 시위행진이 벌어졌다. 이날의 총궐기를 (지난 88년 8월 8일의 반군부 항쟁을 ‘8888항쟁’이라 부르듯이) ‘2’가 다섯 개 모인 날(2021.02.22)에 벌어진 항쟁이라는 의미로 ‘22222항쟁’이라 불렀다. 이 명칭에는 8888항쟁의 정신을 계승한다는 의미와 함께, 반쿠데타 시위와 총파업을 계속 이어가겠다는 강한 의지가 녹아 있다. 일방적 학살에 가까운 잔인한 진압에도 불구하고 미얀마(버마) 인민들의 민주화를 향한 열망은 쉽게 꺾이지 않았다.
항쟁이 더 넓어지고 치열해지자, 쿠데타 군부는 더 잔인한 진압을 결정하고 실행했다. 노동조합이 앞장선 2월 28일 대규모 ‘2차 총파업’이 벌어진 날, 전국 각지에서는 진압군의 무차별 총격이 있었다. 전국에서 최소 18명의 사망자와 함께 수많은 부상자가 속출했다. 미얀마(버마) 인민들은 이날의 비극을 ‘피의 일요일’이라고 불렀고, 이 소식을 접한 전 세계가 경악했다.

진압군의 총격에 의한 사망자 중에 ‘Aung Htet Naing’이라는 이름의 청년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How_Many_Dead_Bodies_UN_Need_To_Take_Action”이라는 처절한 해쉬태그를 올린 뒤 시위에 나섰고 진압군의 총탄에 희생되었다.
진압군의 살인진압에 오직 맨몸으로 맞서고 있는 미얀마(버마) 인민들 모두는 국제사회를 향해, 지금 당장 이 잔인한 학살을 멈출 실질적인 “Action”을 실행해달라고 처절하게 요청하고 있다. 침묵과 무관심으로 인해 무고한 미얀마(버마) 인민들을 더 이상 ‘시체’로 만들지 말라고.
그러나 국제사회의 대응은 느렸고, 또 충분하지 못했다. 미국과 유럽, 한국 등 각국에서 쿠데타 규탄성명이 이어지고, 유엔은 안보리를 소집해서 미얀마(버마)에서의 학살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고는 있다. 그러나 여기에 강대국 간 패권경쟁이 개입하면서, 학살을 멈출 실질적인 “Action”의 전망은 여전히 난망한 상황이다. 군부에게 실질적인 타격이 갈 조치들(전면적인 투자철회, 무기금수, 자금동결 등)은 제대로 결행되지 못하고 있고, 미얀마(버마)의 전통적인 우방국인 중국과 러시아, 그중에서도 중국은 여전히 미얀마 군부세력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고 있다.12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그들은 ‘내정 불간섭’ 원칙을 주장하며, ‘거부권’을 통해 국제사회의 미얀마(버마) 군부를 향한 제재나 직접적 개입 시도를 좌절시키고 있다.
쿠데타와 시민학살에 대해 국제사회가 아무런 실질적 행동을 취하지 못하는 사이, 미얀마(버마)에서의 학살은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3월 3일에는 지난 2월 28일의 ‘피의 일요일’보다 더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유엔 특사의 집계에 따르면, 전국 각지에서 최소 38명의 사망자가 보고되었다. 시위대를 향한 기관총 발사까지 목격되는 등 시위 진압을 빙자한 끔찍하고 일방적인 학살이 자행되었고, 희생자의 명단 속에는 또 다른 19세 여성의 이름도 있었다.13 지난 3월 14, 15일 이틀 동안에는 또 다시 38명의 희생자가 나왔다. 그 희생자 중 대다수가 양곤시의 공단지대와 노동자 밀집구역에서 나왔다. 노동조합이 시민 불복종의 선봉으로 나선 데 대한 탄압으로 보인다. 이날로 쿠데타 이후 진압군에 의해 학살당한 희생자의 수가 100명을 넘어섰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동안에도 미얀마(버마)의 상황은 시시각각 악화되고 있다. 살인적인 진압은 한밤중까지 이어지고 있고, 쿠데타 세력은 공공연하게 ‘인내가 다했다’ 운운하며 더 큰 학살극을 협박하고 있다. 발포는 계속되고 있고 시위대는 계속 죽어 가고 있다. ‘미얀마 나우’등 군부에 동조하지 않는 언론은 공격당하거나 폐쇄되고, ‘곧 인터넷과 전기가 차단되고 대대적인 진압 학살이 개시될 것’이라는 흉흉한 소문도 떠돌고 있다.
불안과 공포가 거리를 떠돌고 있지만,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과 군부의 만행에 대한 분노도 하늘을 찌른다. 희생자가 속출하고 있는데도 물러서지 않고 ‘시민 불복종’이 이어지고 있다. 더불어 다양한 방법으로 국제사회에 연대와 지원, 실질적인 개입을 호소하고 있다.
한편, 지난 총선에서 당선된 NLD 등 민주세력의 의원단은 ‘연방의회대표위원회(CRPH)’를 구성하고, 이를 현재 미얀마(버마) 내의 ‘유일 합법정부’로 선언했다. 이들은 ‘연방 민주주의’를 선언하고 소수민족 저항단체와 함께 반쿠데타 연대전선을 폭넓게 형성하고, 쿠데타 군부를 타도하고 미얀마(버마)의 새시대를 여는 ‘혁명’으로 나아가자고 호소하고 있다. 국제사회를 향해서도 CRPH를 유일 합법정부로 승인하기를 요청하고 있다.
지금 미얀마(버마)는 쿠데타에 대한 시민 불복종에서, ‘혁명’ 대 ‘반혁명’의 결정적인 대결 국면으로 전화하고 있다.
3. 쿠데타의 배후와 공범들
무엇보다 미얀마(버마)의 군부세력은 국민의 민주화 열망을 짓밟고, 시대적 추세를 거스르는 반동적 집단임이 분명하다. 길게는 60년대부터 지금까지 장기간 시대착오적 군부독재를 이어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각종 국영기업과 군부소유기업을 통해 국가의 부를 독점하는 부패집단이기도 하다. 또한 그들은 저항하는 시민들을 향해 서슴없이 총구를 들이대고 발포를 명할 정도로 무절제한 폭력의 중독자들이기도 하다. 소수민족과의 장기간의 내전이 이들의 폭력성을 끊임없이 자극하고 정당화했다. 최근 이들의 비인도적 폭력성이 유감없이 발휘된 것이 ‘로힝야 학살’이다.
그러나 지난 역사 속에서 보았듯이, 그들도 폭압과 협상 속에서 끊임없이 움직여왔다. 그들의 ‘악마성’은 스스로 강화해온 측면도 있지만, 여러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조성되어 온 측면도 있다. 국제질서의 변화도 영향을 미친다. 냉전에서 탈냉전으로, 이어 미국 헤게모니의 퇴조 속에 G2 패권경쟁의 국면으로 국제정세가 변화하는 과정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선, 미얀마(버마)의 최근 정세는 이 나라의 지정학적 중요성에 크게 영향을 받아 왔다. 냉전 시기부터 이 지역의 전략적 중요성은 컸다. 미얀마(버마)를 빼고선 인도양 전략을 논할 수 없었다. 미얀마(버마)의 역대 정권은 이 지정학적 이점을 최대한 활용했고, 대외전략으로 늘 ‘(비동맹) 등거리 외교’를 택해 자신들의 이권을 극대화했다.
최근에는 미얀마(버마)의 지정학상 전략적 가치가 더욱 높아지고 있다. 차기 패권을 노리는 중국의 야심찬 ‘일대일로(一帶一路) 전략’에서 미얀마(버마)는 인도양을 통해 중동과 유럽을 연결하는 해상실크로드[一路]의 핵심이다. 그 일환으로 미얀마(버마)에 군함이 정박할 수 있는 항구를 확보하고, 또 중국 남서부 내륙과 미얀마(버마)를 잇는 교통로를 확보하려 하고 있다. 또 경제제재에 따른 무역 봉쇄에 시달리던 미얀마(버마)에 대한 경제적 교류를 지속적으로 확대해 온 결과, 현재 중국은 미얀마(버마)의 최대 교역국이다. 중국과의 교류와 무역은 미얀마(버마) 군부가 국제 경제제재를 두려워하지 않는 배경 중 하나다.
그 정확한 반대 대칭점으로, 미국의 입장에서 미얀마(버마)는 인도-동남아-극동으로 이어지는 중국 포위망사슬의 완성에 필수적인 고리이다. 그들에게는 중국의 인도양 진출로를 막아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미얀마(버마)에 친미적인 정권이 들어서거나, 적어도 중국에 일방적으로 종속되지 않는 정권의 수립이 미국의 국익에 도움이 된다.
이런 지정학적 정세는 미얀마 군부가 미-중 사이를 오가며 자신들의 안정적 권력을 확보할 운신의 폭을 더 넓어지게 만들었다. 헤게모니의 충돌이 첨예하게 일어나는 지점으로서 일종의 진공지대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미국도 중국도 미얀마(버마)가 상대편의 세력권으로 완전히 넘어가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이 상충하는 힘의 상쇄와 공백은 미얀마(버마)의 민주화를 향한 여정에 장애물로 작용한다. 미국과 중국이라는 패권 경쟁국 두 나라 모두, 이 지역의 급격한 변화보다 ‘현상 유지’를 바란다는 점이 군부의 완전한 패배와 민주세력의 궁극적 승리를 전망하기 어렵게 한다.14
덧붙여, 최근 발생한 세계적 ‘코로나 위기’는 세계 각국의 자국 우선주의를 강화했다. 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는 허공에 매달아 둔 채, 자국의 ‘발등의 불’을 끄느라 바다 건너 타국 땅에서 잔혹한 학살이 벌어져도 개입을 주저하는 무기력이 길게 이어지고 있다. 미얀마(버마)의 반동 군부가 거리낌 없이 학살을 자행할 수 있는 배후에는, 이와 같은 허약하고 쪼그라든 UN을 비롯한 ‘국제질서’의 무력함도 함께 작동하고 있다.
무엇보다 현재의 사태 전개에 있어서 중국의 책임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 자신의 패권전략을 위해 반인도적 민간인 학살을 ‘내정 불간섭’ 운운하며 직·간접적으로 옹호하는 것은 그들 스스로 학살의 총탄을 재고 방아쇠를 당기는 것과 다름없는 죄악이다.15 국제사회는 미얀마(버마) 쿠데타 군부의 만행을 규탄하는 것과 동시에, 그들의 뒤에서 가장 강력한 돈줄이자 배후세력으로 버티고 선 중국의 무도함도 함께 규탄해야 마땅하다. 중국이 미얀마(버마) 군부의 뒤에 버티고 있는 한, 군부의 학살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둘째로, 쿠데타 군부의 강력한 힘은 넘치는 자금력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군부는 미얀마(버마)의 풍부한 자원들을 모두 틀어쥐고 독점적 사업체를 운영하며 막대한 이권을 얻고 있다. 이렇게 조성된 자금은 무기구입 등의 군비로 사용되거나, 권력 유지를 위한 정치자금, 특권세력의 사치 등에 사용되고 있다. 대표적 군부소유기업 ‘미얀마 이코노믹 홀딩스(MEHL)’ 등에 직접 투자하고 있는 해외자본들은 군부독재와 학살의 ‘돈줄’이다. 이런 ‘피 흐르는(Bloody)’ 기업에 투자의 빨대를 꽂고 있는 대표적인 기업에는 우리나라의 ‘포스코’도 있다. ‘롯데’도 양곤의 호텔에 투자하고 있는데, 이 역시 군부에 그 수익금이 직접 흘러 들어가는 구조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출발한 자금이 미얀마(버마) 인민들을 학살하는 총탄으로 바뀌고, 그 무고한 피로 흠뻑 젖은 달러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악덕기업 포스코, 롯데 등 소유주와 주주의 주머니를 불리고 있다. 더 이상 외면하고 침묵해서는 안된다. 포스코를 비롯한 미얀마(버마) 직접 투자 기업들을 압박하여, 하루 빨리 이 선혈 낭자한 돈줄의 파이프라인을 끊어내야 한다. 하루하루의 실패는 미얀마(버마) 인민들의 죽음을 연장하는 일이 된다.

셋째로, 아웅산 수치와 NLD의 안일함과 무능도 군부의 맹동에 일정한 책임이 있다. 그들은 지난 15년 총선 이후 부분적이지만 국가권력의 한 축을 담당했다. 짧지만은 않은 지난 5년 동안, 그들은 경제개혁과 정치개혁 어느 측면에서도 두드러진 성과를 보여주지 못했다. 반민주적인 헌법 조항을 개정하려는 시도도 없었고, 소수민족 내전의 형식적 종전에만 매달리다가 군부가 자행한 ‘로힝야 학살’사태에 직면해서는 학살 옹호와 면죄부 논란에 휩싸였다. 그 결과 국내외적으로 민주정부의 정당성에 큰 상처를 자초했다. 또한 군부 소유 재벌들의 독점과 특권을 해체하거나 개혁하는데도 아무 계획과 능력이 없음을 드러냈다.
그렇게 군부의 막대한 영향력은 그대로 놔둔 채로, 무모하게도 군부와의 대결 구도를 더욱 확대해 갔다. (이번 쿠데타를 주도한 ‘민 아웅 훌라잉’) 군 최고사령관의 전역을 앞두고 총선에서 참패한 군부의 초조함과 위기의식을 무시했다. 총선 직후의 물밑협상이 결렬된 뒤 거듭된 군부의 경고와 협박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대비도 없이 쿠데타의 날을 무기력하게 맞이했다. 정작 앞장서서 투쟁할 책임이 있는 자들은 모조리 안전한(?!) 감옥 안에 격리되어 버리고, 평범한 미얀마(버마) 인민들만 맨몸으로 진압군의 총탄이 쏟아지는 거리로 나서야만 하는 상황으로 내몰린 꼴이다.
하지만 그런 과오와 한계에도 불구하고, 지금 당장은 그간의 민주화투쟁의 성과와 합법정부로서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속에서 NLD를 중심으로 광범위한 ‘반독재 연대전선’을 형성하는 것이 우선일 것이다. ‘연방의회대표위원회(CRPH)’를 유일 합법정부로 인정하는 모든 세력이 함께 뭉쳐 싸워야만 야만적인 군부와 맞서 끝까지 투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투쟁과 병행하면서 수치와 NLD의 무위-무능을 비판하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과거의 과오와 한계에 대한 비판과 극복이야말로 새로운 시대의 필수적인 기반이 될 것이기에.
쉽게 낙관할 수는 없지만, 치열한 투쟁의 전선에서 새로운 연대와 새로운 조직역량이 성장하고 있음을 본다. 봉제공장 여성 노동자들을 비롯한 노동조합이 전면에 나섰고, 학살 피해자인 로힝야도 반쿠데타 연대에 함께하며,16 소수민족 해방조직들은 ‘연방 민주주의’를 외치면서 함께 반쿠데타 시위행동에 나서고 있다. 앞서 보았듯이 CRPH도 ‘연방 민주주의’를 적극 수용하면서 독재 타도와 ‘혁명’을 외치고 있다.
또한 휴대폰과 SNS로 무장한 Z세대 젊은이들은 반쿠데타 투쟁의 최선두에서 새로운 투쟁역량으로 성장하고 있다. 눈물겨운 투쟁 속에서도 결코 물러서지 않으며, 각종 기발한 방법으로 살인진압에 대항하고 연대를 확장하고 있다.
지금 미얀마(버마)는 8888항쟁의 정신을 계승하며 반동군부와 끈질기게 맞서는 투쟁을 벌이는 한편, 구시대의 한계를 뛰어넘어 민주화와 사회진보의 새로운 단계로 도약하는 과제도 동시에 수행하는, 이중의 싸움이 진행되고 있다. 여기에 미얀마(버마)의 미래가 달려 있다.
4. 우리, 이 ‘져서는 안되는 투쟁’에 함께 연대하자
미얀마(버마) 인민들은 지금의 반쿠데타 투쟁을 “Spring Revolution”이라고 부른다. ‘봄날의 혁명’ 또는 ‘봄을 부르는 혁명’.
이것은 반동군부가 지배자로 군림하는 것을 단 한시도 용납할 수 없기에 나선 투쟁이다. 또한 아웅산 수치가 풀려나고 NLD가 권좌로 복귀한다고 해서 완전히 끝나는 투쟁도 아니다. 미얀마(버마)는 지금, 더 나은 사회를 향해 목숨 걸고 투쟁에 나서고 있다. 구시대의 군부독재뿐만 아니라, 미얀마(버마)를 찢어놓은 분열과 무능과 정체로는 결코 돌아갈 수 없다는 투쟁 – ‘혁명’을 항해 나아가는 그런 첨예한 전선 위에 서 있다.
미얀마(군부)가 현재 자행하고 있는 폭력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인류의 일원으로서 도저히 참아낼 수 없는 참상이다. 자신들의 반동적 특권을 지켜내기 위해서라면, 미얀마 인민들의 목숨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이것은 반동군부의 미얀마(버마) 인민에 대한 전쟁행위일뿐만 아니라, 전 인류에게 ‘인간의 조건’을 묻는 반인륜적 선전포고 행위이다. 이를 묵과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인간으로서의 자부심을 말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져서는 안 되는 싸움’이며, 우리 모두가 함께 싸워 ‘이겨야만 하는 싸움’이다.
우리들은 지난 투쟁의 역사 속에서 -그 중에서도 ‘80년 광주’의 참혹한 기억과 부채의식 위에서- 민주화와 해방을 향한 열정을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전진해왔다. 그것이 우리의 ‘질 수 없는 싸움’이었다. 군부독재의 폭압과 맞설 때, 세계 곳곳에서 도착한 연대와 응원은 가뭄 속의 단비로 우리의 목을 축였고 힘을 내서 다시 싸울 용기를 주었다. 그러한 투쟁과 연대의 피와 눈물 속에 우리는 오늘에 이르렀다. 오늘날 형식적인 민주화는 진전되었고, 군대가 자국민을 길거리에서 쏴 죽이던 기억에서도 아주 멀리 걸어왔다. 아직도 가야할 길은 멀지만, 우리는 오늘 여기까지 왔다.
그리하여 홍콩에서, 태국에서, 캄보디아, 미얀마(버마)의 투쟁의 현장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의 번안곡들이 투쟁가로 불리는 오늘을 맞이했다. 그들은 우리의 투쟁의 역사와 성과를 존중하며, 앞서 걸어가고 있는 우리에게 연대를 요청하는 손길을 내밀고 있다.17
우리는 이 요청에 인류로서, 아시아의 일원으로서 성실히 답할 책임이 있다.
미얀마(버마)의 ‘봄을 부르는 혁명’에 연대하자. 우리 정부가 미얀마(버마) 군부의 쿠데타에 단호히 반대하고, 국제사회에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민주세력 지원 방책을 마련하는 논의에 앞장서도록 압박하자. ‘포스코’를 비롯한 악덕기업들이 미얀마(버마) 군부의 돈줄 노릇을 하고 있으며, 피 묻은 돈으로 배를 불리고 있음을 폭로하자. 종국에는 그 유혈낭자한 투자를 중단할 때까지 싸우자. 자국의 이해를 최우선하는 강대국 간의 냉혹한 국제전략을 단호히 비판하고, 그들 자신의 미래를 평화와 민주주의로 채우기 위해 투쟁하는 미얀마(버마) 인민들의 투쟁에 무조건적인 지지-연대를 보내자. 인간으로서 함께 싸우자. 〈끝〉
- 독립 이후 ‘버마’로 불려왔던 이 나라의 국호는 8888항쟁을 잔인하게 진압한 직후인 89년에 군부세력에 의해 ‘미얀마연방’으로 개칭되었다. 그러나 이 정권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는 (NLD를 포함한) 민주세력들은 국호 개정을 거부하고 버마라는 국호를 고수했다. 오늘날까지도 이 나라 국명의 표기는 군부정권의 정통성과 연관된 논란이 정리되지 못한 상태이다. 이 글에서는 그러한 논란을 반영하고자 국명을 “미얀마(버마)”라고 병기할 것이다. ↩︎
- 버마는 독립 직후 한동안은 세계 1위의 쌀 수출량과 풍부한 천연자원 등을 바탕으로, 아시아 내에서는 경제적 발전이 가장 앞선 나라로 평가되기도 했었다. 그러나 길게 이어진 1당독재와 버마식 사회주의라는 고립경제체제의 결과, 군부가 모든 정치권력과 경제적 특권을 독점하는 등 경제적으로 부패하고 낙후된 국가로 전락했다 (2018년 기준, 1인당 GDP 순위 세계 156위). ↩︎
- 독립영웅 아웅산의 딸. 8888항쟁 발발 소식을 듣고 영국에서 귀국하여, NLD의 지도자로 시위에 선두에 나서며 항쟁의 상징이 되었다. ↩︎
- 상하원의 25%를 군부 몫으로 의무적으로 할당, 외국인(영국인)과 결혼한 아웅산 수치의 피선거권을 원천 봉쇄, 군부의 내각 임명권과 헌법을 정지하는 비상조치권 등. ↩︎
- 기득권 유지를 위해 과거의 폭압체제로 언제든지 돌아갈 의지와 능력이 있었던 군부와의 정면 대결을 회피하고, 그들의 부당한 권력과 경제적 특권을 용인한 이 선택이야말로 2021년 쿠데타의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아웅산 수치와 NLD의 최대 실책이라 생각한다. ↩︎
- 2017년에 발생한 군부에 의한 ‘로힝야 학살’에 대한 책임을 아웅산 수치와 NLD에게도 함께 묻는 이유이기도 하다. 수치는 (일정한 제한은 있었으나) 국정의 최고책임자에 속했으며, 그 정부 아래에서 벌어진 모든 일에 대해 그만큼의 권한과 책임을 갖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수치를 포함한 NLD 지도자들은 공개적인 자리에서 ‘로힝야는 역사적 문화적으로 미얀마(버마)에 속하는 소수민족이 아니며, 난민도 아니다. 단지 불법으로 국경을 넘어와 사는 범법자일 뿐이다.’ 같은 발언을 함으로써, 군부가 자행한 인종청소 학살에 면죄부를 주었다는 책임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다. ↩︎
- NLD는 상원에서 138석, 하원에서 256석을 얻었다. 반면 군부가 지원하는 연방단결개발당(USDP)은 각각 7석과 26석을 얻는 데 그쳤다. 25% 자동배정 조항이 있더라도 군부의 영향력은 지난 총선에 비해 더 약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
- 미얀마(버마)는 다수민족인 버마족 주도의 독립이 이뤄진 뒤부터 지금까지 줄곧, ‘소수민족 해방투쟁’이 이어진 ‘최장기 내전 국가’이다. 그러나 현재 카렌족, 카친족, 아라칸족, 로힝야족 등 다양한 소수민족의 독립투쟁조직과 산하 무장조직들은 이번 쿠데타와 관련해서는 의견이 나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버마 민족국가’ 내부의 권력다툼 문제로 보는 냉소적 입장에서부터, 그런 ‘적들’의 내분을 이용하여 민족자치권을 확장하려는 실용적 입장까지 존재하며, 한편으로는 ‘연방제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소수민족도 반 쿠테타 투쟁에 적극적으로 동참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다양한 차이가 존재하고 있다. ↩︎
- 군부 쿠데타에 맞서 가장 활발하게 맞서 싸우는 이들은 바로 노동자들이다. 미얀마노총(CTUM)은 성명을 통해 군부에 협력하지 않고 ‘시민불복종 운동’에 함께 할 것을 호소했고, 미얀마교사연맹(MTF) 역시 군부 쿠데타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국영 에너지 기업과 항공사, 철도, 광산, 병원 현장, 의류봉제 공장 등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하나둘씩 파업을 선언하고 거리로 나섰다. 이런 흐름은 대규모 시위 3일차에 접어든 지난 2월 8일에 전국적인 총파업으로 확대됐다. 참고로 가스와 의류산업은 미얀마의 가장 대표적인 산업이다. ↩︎
- 사경을 헤매다가 며칠 후 결국 사망함으로써, 진압군의 총격으로 인한 첫 희생자가 되고 말았다. ↩︎
- 이날의 시위 진압에 투입된 ‘33경보병사단’은 ‘로힝야 인종청소(학살)’ 과정에서 가장 끔찍했던 ‘인딘마을 학살’을 자행한 부대라고 한다. ↩︎
- 최근 미얀마 군부는 쿠데타의 정당성을 강변하기 위해, 수치와 NLD의 친 중국 정책이 국가의 이권을 중국에 팔아먹는 지경에 이르렀기에 쿠데타에 나섰다는 주장까지 하고 있다. 사실, 중국은 미얀마 군부와 아웅산 수치 및 NLD 양쪽 모두에 선을 대고 자신들의 국제전략에 활용하는 정책을 펼쳤다. 이 점에서 중국은 미얀마(버마)의 쿠데타와 학살극의 중대한 개입자이자 공동 책임자이다. 지금의 사태가 파국으로 치닫는 데에는 중국의 자국 이익 최우선의 냉혹한 국제전략이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 ↩︎
- Ma Kyal Sin으로 알려진 희생자는, 시위에 참가하기 전에 (유언의 의미와 같은) ‘연명조치 거부’와 ‘장기기증 의사’를 페이스북에 올렸다는 사연과, 안전한 귀가를 기원하는 의미로 그녀의 아버지와 사진을 함께 찍은 직후에 총격의 희생자가 되었다는 가슴 아픈 사연으로 많은 이들의 마음을 울렸다. 그녀가 또 다른 저항의 상징이 될 것을 우려한 군부는 장례식 직후 그녀의 시신을 강제로 도굴하여 함부로 검시한 후 다시 매장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러면서 그녀의 머리에서 나온 총탄이 보안군의 총탄과는 다르다면서 사인을 조작하려고까지 했다. ↩︎
- 현재는 미얀마(버마)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이 훨씬 강해 보이지만, 미얀마(군부)는 역사적으로 반중(反中)성향이 강했으며, 자신들의 지정학적 이점을 최대한 활용하여 등거리 외교를 펼쳐온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다. 중국의 ‘내정 불간섭’ 원칙과, 미국 등 서방의 어정쩡한 태도야말로 사태 해결의 가장 심각한 장애가 되고 있다. ↩︎
- 일부 NL성향 운동조직 및 언론 등에서 이번 미얀마(버마) 사태를 ‘반미-반제’의 협소한 틀로 해석하여, 쿠데타 군부와 중국을 모두 옹호하는 반인도적이고 반민주적, 편향적 입장을 제출하고 있다. 이들은 이전의 홍콩 민주화시위 탄압국면에서도 비슷한 논리로 중국의 무력진압을 옹호하는 황당무계한 입장을 제출하기도 했다. ↩︎
- 진압군의 가공할 살인적 폭력에 반복해서 노출되면서, 다수 ‘불교도-버마족’ 내에서도 지난 과오에 대한 반성이 산발적으로나마 나오고 있다. 소수민족 대상 내전에서의 군의 만행과 로힝야 인종청소-학살을 묵인하고 방조했던 과거를 반성하며, 함께 시위에 나서는 이들을 미얀마(버마)의 동등한 구성원으로, 연대투쟁의 동료로 인정하는 이들이 조금씩 늘고 있다고 한다. 미얀마(버마)의 미래를 위해 고무적인 현상이다. ↩︎
- 주 미얀마(버마) 한국대사관 앞마당에 무릎을 꿇은 채, 한국어로 ‘도와주세요!’, ‘살려주세요!’를 외치던 미얀마(버마) 인민들의 부름에 우리는 무엇으로 응답할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은 베트남의 삼성전자 노동자들이 파업투쟁을 할 때, 태국의 반왕정 민주화투쟁, 홍콩의 반중국 민주화투쟁을 멀리서 지켜볼 때마다 우리에게 반복해서 제기되던 질문이기도 하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