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란을 넘어 ‘로컬-페미-퀴어 네트워크’를 만들어가자.

윤석열 탄핵광장을 돌아보며

– 내란을 넘어 ‘로컬-페미-퀴어 네트워크’를 만들어가자.

채민 (전북평화와인권연대 상임활동가)

12.3 쿠데타를 일으킨 내란수괴가 파면될 때까지 많은 장면이 떠오르지만 가슴 아픔 참사에 더 힘겨웠던 시간이 유달리 기억난다. 1월 4일, 2025년 첫 번째 <윤석열퇴진 전북도민대회>에선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임시 분향소가 열렸다. ‘윤석열퇴진 전북운동본부’ 차원에서 분향소를 담당했던 그날, 여러 시민들이 분향을 했고 그 중 상당수는 십대부터 2030 여성시민들이었다. 향가루로 분향을 하는 것이 처음이라며 방법을 알려달라는 그들의 모습에서 마음이 울렸다. 12.3 윤석열 내란 사태와 그 이후는 그러한 이들이 함께 만들었던 투쟁이었음을 새삼 돌아보게 된다.

내란 사태를 겪으며 시민들마다 분노하고 두려워한 지점들이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내란 우두머리의 핑계에 더욱 큰 분노가 일어났다. ‘국민의 자유와 안전, 국가 지속가능성을 보장하며, 미래세대에게 제대로 된 나라를 물려주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로 비상계엄을 포장한 그 부분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윤석열이 말한 자유와 안전, 지속가능성은 핑계일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구조적 차별과 혐오의 사회에서 평등 없이 안전은 없다고 했던 여성과 성소수자, 자본천국에서 최소한의 권리인 노조 할 자유를 보장받으며 일하다 죽지 않겠다고 외치는 노동자들, 돌봄과 지역소멸 방지를 위한 대체품으로 밀어 넣지 말라는 이주민들, 그리고 10.29 이태원참사를 비롯해 국가가 구조하지 않은 사회적 참사의 피해자들. 헌법의 수호자로서 대통령이 지켜야 하는 이들에게 자유와 안전은 없었다. 그럼에도 윤석열은 인권보장의 의무는커녕 이를 철저히 외면했다. 그리고 끝내 시민들을 반국가 세력과 ‘선량한 국민’으로 갈라치기 하는 내란을 일으키며, 차별과 혐오를 조장한 극우정치의 마지막 장을 열었다.

비상계엄 다음 날 아침, 전주에서도 윤석열 타도 집회가 열렸다. 내란 사태의 밤과 새벽 사이 긴급 공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민주노총만이 아니라 사회단체와 시민들이 모인 집회와 행진에 힘을 느꼈다. 그리고 국회의 탄핵안 가결전까지 거의 매일 진행된 윤석열 퇴진 집회에 ‘응원봉 시민들’로 불리던 이들이 또 다른 힘을 만들었다. 전국의 광장은 물론, ‘TK의 콘크리트는 TK의 딸들에 의해 부서질 것이다.’라 선포한 대구의 거리, 경찰차벽에 막혀있던 전봉준 투쟁단의 농민들과 트랙터가 서울로 진입할 수 있도록 한 남태령 투쟁에 그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상당수가 새롭게 광장으로 나온 것이 아니다. 세월호와 10.29 이태원참사를 겪고, 강남역 살인사건부터 딥페이크까지 이어지는 젠더 폭력과 차별에 두려워하면서도 포기하지 않은 십대 그리고 2030 여성과 퀴어 시민들이 그들이었다. ‘폭주하는 남성성의 시대는 끝났다’는 ‘페미-퀴어-네트워크’의 투쟁선언처럼 극우의 반대편에서 윤석열 퇴진의 연대가 만들어졌다. 아이돌노래를 즐기러 온 것이 아닌 ‘투쟁’하기 위해 거리와 광장으로 나온 이들과 함께 하는데 응원봉과 케이팝은 하나의 매개였지만 중요한 것은 마음이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의 의미와 ‘다시 만난 세계’의 가사를 함께 얘기하고, 영화 ‘1987’속의 아지테이션(선동 구호)을 설명하며 함께 외치고 노래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을 배웠다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의 뭉클한 마음을 잊을 수 없다. 연대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윤석열과 내란 세력은 탄핵 가결 이후에도 제압되지 않았다. 직무가 정지되고 헌정 파괴 시도가 더욱 뚜렷해졌음에도 윤석열은 경호처를 사병화하고 국회의원의 탈을 쓴 국힘과 극우세력을 집결시켰다. 전북지역에서는 체감할 수 없지만 이들로 인한 혐중 정서와 음모론, 사적 폭력과 사상검증이 증폭되었다. 그 사이 내란범 체포영장을 집행해야 될 공권력은 눈치만 보다 간신히 체포와 구속을 시켰지만 사법부는 내란범만을 위한 원칙과 관용으로 석방시켰다. 심지어 국가인권위원회는 비상계엄으로 인한 시민들의 피해가 아니라 내란세력을 옹호하는 입장을 발표했다. 내란범의 권한대행들의 권한남용까지 겹쳐지며 희미해진 헌정질서와 법 앞의 평등이 소멸될 수 있다는 위기감과 긴장감이 곳곳에 있었다. 헌재의 파면 선고로 어느 정도 일단락되었지만 끝이 나지 않는다. 극우의 준동은 오래전부터 보수 양당 정치의 모순과 문제의 틈바구니에서 단단해져갔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윤석열 퇴진 광장 한 축엔 또 다른 긴장감도 존재했다. 서울시장 성폭력 사건의 가해자를 옹호하는 사람들, 성소수자가 있으면 집회에 나오고 싶지 않다며 혐오의 정서를 내보이는 사람들이 광장에 함께하고 있었다. 전북평화와인권연대가 차별과 혐오를 넘어 연대의 의미인 무지개 깃발과 차별금지법 제정 깃발을 들고 있을 때에 부정적인 말을 하는 민주노총 조합원들도 있었다. 성소수자, 페미니스트임을 외치며 발언한 서울의 광장과 거리의 시민들에 비교하면 전북도민대회에서는 희소한 편이었다. 주체들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1월부터 총 열 차례 진행된 <윤석열 퇴진 세상을 바꾸는 수요일! 전주오픈이크>에서는 2회에 한번 정도씩 커밍아웃(성소수자가 자신의 성적지향이나 성별정체성 등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이 있었다. 같은 시간에 거리로 나온 시민들과 광장이 만들어진 지역의 이러한 차이는 윤석열 파면 이후 평등사회를 향해 나아갈 운동의 길이 순탄치 않음을 보여준다.

10차 오픈마이크를 마친뒤(2025년 4월 9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역사회운동이 함께 만들어갈 길은 분명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서울이 아닌 바로 우리가 살아가고 만들어가는 지역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느 먼 곳에 있는 이상향이 아닌, 지금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여기에서 페미니스트, 성소수자와 함께 지역의 운동을 만들어가자.

Post Author: 전북노동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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